에드워드 호퍼, <밤의 창문>를 보고
잠옷을 꼭 챙겨 입고 자던 시절이 있었다. 소매와 바짓단에 주름을 잡아 물결 모양으로 장식이 달려있고, 가슴에는 작은 리본이 달려있었다. 30년의 세월을 지나, 요즘 막내딸이 내가 입던 잠옷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 그 당시 원피스로 된 잠옷이 너무 입고 싶었다. 엄마가 사 온 원피스를 입고 공주가 된 것 같은 들뜬 마음으로 잠이 들었는데, 현실은 동화책이나 만화영화와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아침에 잠을 깨면, 원피스는 둘둘 말려서 팬티 위까지 올라온 채 엉망이 된 모습으로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그 후로 원피스 잠옷을 탐내지 않게 되었고, 어느 순간 잠옷을 사고 입는 것도 귀찮아졌다. 고무줄 바지와 낡은 티셔츠가 실내복 겸 잠옷을 대신한다. 참 편안하고 효율적이다.
지난여름, 지인으로부터 옷 두 벌을 선물 받았다. 재봉해서 직접 옷을 만들어 입고 판매까지 하는데,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샘플로 만든 옷과 작은 손편지를 택배로 보내주었다. 시원한 원단으로 만든 아이보리색의 긴치마와 새하얀 민소매 원피스 잠옷이었다. 치마를 입은 모습을 사진에 담아 지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원피스 잠옷은 한참 바라보며 매만지기만 했다. 결국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고, 새하얀 색을 그대로 유지하며 옷장에서 그 여름을 보냈다. 하얀색이 부담스러웠는지. 평소 잠옷을 입지 않아서인지. 원피스 잠옷이 어색했는지.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사계절을 보내고, 다시 무더운 여름을 맞았다.
그 사이 잠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에 인터넷 사이트를 몇 번 뒤적거렸다. 코로나 일상도 계속되면서 외출복에 대한 관심도 사라졌는데, 다양한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한참 잠옷을 구경했다. 잠잘 때 단순히 이불속에서 입는 옷일 뿐인데, 외출복만큼이나 잠옷의 종류도 무척 다양했다. 그중 여러 번 눈길이 갔던 잠옷은 맨들 거리고 찰랑거리는 실크 소재의 슬립과 가운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종종 여주인공이 침대에 우아하게 누워있는 장면에서 꼭 입고 있는 잠옷이다. 한번 입어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궁금함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설렌 마음도 잠시, 현실의 속삭임이 찬물을 왈칵 끼얹는다. 세 아이를 재우고 챙기는 밤에 슬립을 입은 모습은 불편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하이힐을 신고 정장을 입고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는 모습이랄까.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서 여름에도 양말과 얇은 이불을 찾는 체질이라 슬립을 상상만으로도 몸을 잔뜩 움츠리게 했다. 몇 벌의 슬립과 가운은 장바구니에 담긴 채, 바쁜 일상에 조용히 묻혔다.
삶은 살수록 정신없고, 시간은 흐를수록 속도를 더한다. 무더운 여름이 다시 찾아왔고, 더욱 빠르게 이 여름이 흘러간다. 더위가 한창 영글어가는 때, 새벽녘 창문 너머로 선선한 바람이 아침 인사를 한다. 벌써 가을이 찾아온 것인지 화들짝 놀랐다. 숨 쉬는 것만으로 지치는 계절이지만, 시원한 바람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시간을 잡아둘 수만 있다면 이까짓 더위쯤이야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시원한 가을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문뜩 새하얀 원피스가 떠올랐다.
어쩔 수 없이 곧 선선한 바람이 찾아오겠지. 선선함은 금방 차가움으로 변하고 새해를 맞아야 하겠구나! 새하얀 원피스가 세월의 흔적으로 누렇게 변하기 전에, 오늘은 옷장 속 잠옷을 꺼내서 입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