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으로 얻을 수 있는 자본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건 도시의 경쟁력이다.
초등학교 6학년 난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갔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파트의 동과 호수를 구분하는 법을 몰랐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도시의 친구들은 하교 후 모여드는 곳이 운동장 혹은 놀이터 그리고 시내였다.
어떤 날이었을까?
나는 새롭게 만난 친구들과 시내를 갔다.
'주문해야지?'
내가 도착한 곳은 맥도널드였고,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러한 곳을 마주했다.
정신이 아득했던 기억이 있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고,
나는 무엇을 주문했는지 기억에 없다.
결과적으로 뭔가를 주문하고 친구들과 같이 햄버거를 먹긴 했겠지.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 남은 장면은 너무 높이 달려있는 알 수 없는 버거종류의 이름들과
나에게 어서 주문하라 재촉하던 목소리 그리고 주변이 너무나도 시끄러웠던 어떤 한 장면이다.
도시를 마주한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놀이 문화가 달랐다.
노래방을 가고, 햄버거를 먹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내 중심가를 걸어 다녔다.
모든 행위에는 돈이 필요했고, 시끄러운 주변소리에도 친구들의 소리를 걸러들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전학을 가기 전 하교를 하면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놀거나 혹은 바닷가에서 놀거나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하는 농두렁에서 올챙이를 잡고,
추수 준비로 줄 맞춰 세워 둔 볏단 위에서 말타기를 했다. 그러고선 논 주인아저씨에게 엄청 혼이 났다.
추수가 끝나 산더미처럼 쌓아둔 볏짚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아이들과 놀았다.
그리고선 밤이면 풀독이 올라 한껏 부풀어 오른 붉은 피부를 긁어대며 약을 덕지덕지 발라야 했다.
그렇게 놀았다.
도시는 나에게 선택지를 강요했다. 용돈이 충분한 날과 그러하지 못한 날을 구분했고,
초등학교 학생들이 갈 수 있는 곳과 가지 못하는 곳을 구분했다.
시간에 맞춰 가야 하는 곳(학원)이 정해져 있었고,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친구들의 동선이 나누어졌다.
시골에서 나의 동선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초등학교 (포항시에서도 구룡포 방향으로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동네다)
로 갈 수 있는 동선의 가짓수는 내가 정하기 나름이었다.
어느 날은 해변가로, 어느 날은 논두렁으로 돈이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모든 공간이 오픈스페이스였다.
논과 밭에는 각각의 주인이 있었지만 올챙이를 잡을 수 있었고, 무당벌레도 잡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없었지만
하교 길에 휘파람을 불면 꼬리를 흔들며 대문 밖으로 나와 애교를 부리던 앞 집 강아지가 있었고,
지하수가 나오는 집 마당은 동네 사람들 약수터와 같았다.
동네 친구들이랑 놀다가 목이 마르면 그 집 마당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시면 되는 일이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도시 생활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익숙해졌지만 갈 수 있는 곳의 범위는 여전히 정해져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더 세분화된 듯하다.
도시 내에서의 이동은 목적성을 가진다. 비즈니스, 커뮤니티, 문화, 교육 등 각각의 목표지점을 향해 움직이고,
정해진 틀 안에서 목적을 위한 행위를 가진다.
이동의 경로는 자본의 흐름과도 연관된다.
내가 사는 거주지, 교육의 장소, 커뮤니티 장소 등 각자의 자본량에 따라 설정된 목표지점으로 이동한다.
각자가 마주하는 도시의 풍경은 다르다.
이는 앞서 말한 자본량에 따른 이동의 경로에 따라 경험의 풍경은 달라지게 된다.
'무엇이 도시의 얼굴을 만드는가'의 리처드 윌리엄스에 따르면 도시의 풍경은 설계가에 따르는 것이 아닌
프로세스로 만들어진다 말한다.
나 역시 공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프로세스의 흐름 내에 정부의 역할이 꼭 필요하고,
설계가의 혜안이 필요하다.
사유화된 도시의 지번은 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공유화된 도시의 빈자리를 만드는 것.
뉴욕의 맨해튼을 떠올려보면 도심 중앙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센트럴파크를 빼놓을 수 없다.
뉴욕의 자치구 안에서도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 100만 평이 넘는 공원이라니.
도시 안에서 얼마나 비워낼 수 있는가의 자신감은 도시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부심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자신감은 여느 도시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워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인원이 충분해야 하고, 그것을 운영관리 할 수 있는 자본력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비어있는 땅을 보며 부동산으로 얻어질 수 있는 다양한 수익 모델을 포기할 수 있는
도시의 경쟁력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도시 안에서 비움의 공간을 기획한다는 것은 자신감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상상해 보건대,
가장 혁신적이고, 경쟁력 있는 도시의 미래 청사진을 말하고자 한다면
빼곡한 빌딩으로 상징되던 도시얼굴은 이제 과거형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다양성의 가치가 보편화된 도시>
각자가 영위하고 있는 삶의 범위에서 경험하는 것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은
자본, 배경과 상관없이 중첩되는 배경이 많아야 가능하다.
어느 기사에서 고급아파트 놀이터에 해당 아파트 거주하지 않는 아이들이 놀다가 쫓겨났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사유화된 도시의 지번이 타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이들을 내쫓은 부모들이 타 국가에서 인종차별을 당한다면 그때는 어떤 항변을 할까?
중첩의 경험을 허용하지 않는 도시는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다양한 인종, 문화, 젠더, 경험들이 혼합되는 도시는 창의성을 발현한다.
어떠한 도시를 경험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