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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생 Oct 04. 2022

세상에서 가장 힘이 되는 책

#12.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_채사장

개인적으로 읽었던 모든 책중에 가장 힘이 되는 책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나는 이 책을 고를 것이다.

책을 추천해달라는 말에 가장 많은 빈도로 추천했던 책이기도 하다.

 안에 엉켜있던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아주 간결하고도 깔끔하게 풀어낸 내용이 담겨있어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려서부터 죽음이 궁금했다.

이상하게 죽음이 무서웠고, 두려움 없이 이 생을 살아내기 위해 죽음을 정의 내려야 했다.

중학교 내내 나는 죽음 자체에 대한 생각을 끝없이 했다. 사춘기 아이들의 인간관계도 학업도 이 고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죽으면 무엇이 되는지 알아야 했고, 죽음 이후에 뭐가 있는지 아니 그보다  태어났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의 답을 찾아야 비로소 사는 동안 마주하는 현실적인 일들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있을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 고등학교 입학 전, 나는 죽음을 내 나름대로 규정했다.


내 결론은 완전한 죽음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 결론의 이유는 딱 하나. 이렇게 믿고 사는 게 내 삶에 가장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 믿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내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죽는 건 불가하다고 믿고 있다.

이게 정답인지는 모른다.

세상엔 죽어본 이가 없기에, 아무도 답을 알 수 없다.

죽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종종 있다지만, 결국 죽음까지 가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사람의 말이기에 죽은 자의 진정한 죽음 후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차피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이 문제에 나는 내가 믿고 싶은걸 믿기로 했다.

어차피 세상엔 내 믿음이 틀렸다고 말하며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죽은 사람만이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데, '죽은 사람의 말'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오던 중 이런 제목의 책을 만났다.

너무너무 반가웠고, 동시에 고마웠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다는 게, 정답을 모르는 어떤 현상 앞에서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았다.

그래서 아주 빠르고 단숨에 이 책을 읽었다. 그게 아마도 5년쯤 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서 잊고 싶지 않은 수많은 문장 중에서 가장 믿고 싶은 문장을 적어놓았는데, 아래서 공유해본다.


죽음 역시 하나의 관계 방식이다.
그것은 자아와 부재와의 관계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삶 이면에 있는 거대한 서사구조를 상상할 것이다.

과학을 신뢰하는 사람 안에 던져진 이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지 못해 다만 우연이라 말하고 깊게 침묵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답도 나오지 않는 부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 안에 던져진 이는 그것 그대로 생각할 것이고, 불가지론자에 던져진 이도 그것 그대로 생각할 것이며, 회의주의자에 던져진 이도, 합리주의자에 던져진 이도, 실용주의자에 던져진 이도 그 안에서 꼭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나라는 세계에 던져졌다는 것, 그래서 그것은 너무나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가 된다.

나의 생각, 나의 사유, 나의 논리, 나의 합리성, 나의 믿음, 그 모든 것이 진정으로 내가 노력으로 얻은 것이고 순사하게 나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던져진 나에게 속하는 속성 때문인지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한계, 한국인으로 태어났다는 한계, 특정 종교를 믿는 문화권에 속해 있고, 과학이 진리의 왕좌를 차지한 시대에 살고 있고, 빠른 성장과 민주화를 획득한 사회에 살고 있고, 하필이면 나의 가족 안에서, 하필이면 이런 성별로, 이런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특성 안에 던져졌다는 과도한 우연성.

그래서 그것은 비극이 된다. 나는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던져져 얻은 나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무엇이 비극인가? 어쨌든 우리는 지금도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눈뜬 신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해서, 그것을 아끼고 애지중지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은가?
도대체 뭐가 그리 문제란 말인가?

집착 때문이다.
나의 신체와 내가 가진 것에 마음이 쏠려 한시도 잊지 못하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나의 몸과 나에게 연결된 것들은 너무나 소중하고 유일한 것이라서 그것이 어찌 될까 봐 조마조마해하고, 움켜쥐려 하고, 끝내 감싸 안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이 된다.
살아간다는 것이 생각보다 버거운 이유, 내 삶이라는 게 남의 삶보다 더 고된 이유, 나의 삶은 이상하게 번잡하고 고통스러웠던 모든 이유는 그래서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부단한 애씀과는 무관하게, 움켜쥐고 멈춰 세우려는 노력과는 무관하게, 이유도 모른 채 받은 선물은 이유도 모른 채 돌려줘야 할 것이다.
충분히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 세계가 익숙해진 존재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세계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떴던 모든 곳에서 제각기 눈을 감을 것이다.
물고기 안에서 눈떴던 존재는 물고기 안에서 눈감을 것이고, 풀벌레 안에서 눈떴던 존재는 풀벌레 안에서 눈감을 것이다.
짐승 안에서 눈떴던 존재도, 조류 안에서 눈떴던 존재도, 그리고 인간 안에서 눈떴던 당신과 나 역시 이제야 간신히 익숙해진 세계를 그렇게 떠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가 되면, 이 세계에서 첫발을 떼는 바로 그 순간이 되면, 그때서야 우리가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음 쓰던 영화가 끝나듯, 감정을 소모하며 읽었던 소설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듯, 그렇게도 아끼고 애지중지한 나라는 존재도 사실은 하나의 배역이었고, 소설의 등장인물이었고, 내가 반복해서 선택해왔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읽어도 몇 번을 읽어도 내겐 울림이 많은 이다.

과도한 우연성이라는 말도, 눈뜬 신체와 자신을 동일시해 집착하게 된다는 발상까지.

내가 단순하게 완전한 죽음은 오지 않는다고 믿는 것에서 한층  나아가,  생각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삶에 적용해야 하는 태도에 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생이, 내가 반복해서 선택해왔던 수많은 가능성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은 사는데  도움이 된다.

이 말을 나에게 좋은 일과 옳은 일중, 옳은 일을 택하는  쉽지 않을 때마다 떠올린다.

배역이고 등장인물일 뿐이니, 나는 내게 좋은 일보다는 더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그게 맞다고 말이다.


물론 어떤 순간에는, 이 문장이 내게 완전히 닿지 않을 때도 있다.

당장 나한테 '좋은 ' 눈앞에 두고, 불편하고 소모적인 '옳은 ' 택해야 하는 순간 나는 여전히 고민하며 망설이는 그런 인간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 그저  안에서 눈뜬 것뿐이라고, 내 거라고 생각한 모든 건 내 것이 아니고, 타인이라고 그저 남일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일은 어쩌면 완전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옳은 일에, 물론 '옳다는 것' 또한  기준이겠지만, 어쨌든 옳다고 믿는 이 소모적이고 불편하더라도 기꺼이 그쪽을 향하며 산다.

그렇게 언젠가 내가 이 세계에서 첫발을 떼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 어떤 후회나 머뭇거림이 없기를, 홀가분하게 다음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라며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사람에게도,

삶의 동기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읽는 사람이 어떤 존재 안에서 눈떴는지에 따라 다른 것들을 느끼겠지만, 무엇을 느끼든 이 책을 읽은 시간 대비 크고 소중한 어떤 것을 얻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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