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를 통해 모든 순간 연결되어 있는 초연결사회이지만, 왜인지 외로움은 점점 큰 사회적 문제가 되어간다.
함께이지만 혼자인 상황이 오히려 진짜 혼자인 순간보다 견디기 외로워서일까?
외로움이 담배보다 노화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뉴스를 봤다.
개인주의를 선택하고 각자 사는 편리함을 가진 대가로, 우리 사회는 이웃과 마을 같은 개념을 잃었다.
그렇게 복작복작 옆집 수저 개수까지 알았다던 그 사회의 사람들이 외로움을 덜 느꼈을지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걸고 안부를 묻는 일이 지금보단 빈번했을 테니 그래도 조금은 덜 혼자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게 개인주의를 포기할 만큼 가치 있느냐고 물으면 글쎄, 잘 모르겠다.
나는 적당한 거리감이 개인을 더 편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정말 말 그대로 사바사, 사람 바이 사람이다.
개인의 선호도 문제이기에 더 좋고 나쁜 건 없다.
두 가지 모두 장단이 있으니 어떤 단점이 더 견디기 어려운지를 생각해보고 내가 더 버텨내기 쉬운 사회 속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국의 [렌트 어 프랜드]라는 어플에선 시간당 40달러에 친구를 빌려준다고 한다.
이런 서비스의 존재 자체가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진다.
90년대만 해도, 4만 원에 친구가 되어주는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웃들이 찾아와 기꺼이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주었을 것 같다.
이웃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웠던 생각이 문득 난다.
이사를 가면 떡을 돌리고, 집에서 음식을 하면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었다가 위층과 옆집 골고루 한 접시씩 가져다 드렸던 그런 기억.
그럼 그 접시에는 꼭 과일이나 과자 등이 담겨 되돌아오곤 했던 기억.
요즘에 이런 일이 어려운 건, 워낙 개개인의 삶이 다양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때만 해도 해당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의 삶이 대체로 비슷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률적인 삶의 형태라는 게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모두의 삶이 다 재각각이다.
옆집, 윗집, 아랫집 이웃이 무엇을 하는지 쉽게 예상할 수도 없으며, 물어봐서도 안된다.
대답하지 않을 자유. 함께하지 않을 자유. 등이 존중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할 수 없으니 관심과 친목이 줄어드는 일은 당연했다.
알아야 친해지고, 서로를 살필 텐데 남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결국 외로움은 각자의 몫이 된다.
사회적 문제라고 이름 한들, 개인의 외로움을 사회가 어쩔 수 있을까?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제공해준다 해도 그때뿐, 결국 혼자가 되는 순간을 모두가 마주해야 한다.
그렇기에 각자에겐 전략이 필요하다.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전략.
나의 경우 어차피 혼자라는 생각이 모순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곤 한다.
애초에 무엇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말이다.
"인생 다 각자 걷는 거지요"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에 나온 위 대사처럼.
각자 걷던 중 만난 이들과 잠시라도 재밌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또 혼자 걸어가야 함을 잊지 않는다.
내 길이 어차피 나한명 걷는 1인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라고 생각될 수 있는 순간에도, 길 두 개가 이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잠깐 교차로를 걷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
이 생각을 하면 앞으로도 혼자 걸어야 하는 긴 길이 엄청 외롭게 느껴지다가도 누구나 다 똑같이 자기 길 자기가 걷는 거다 생각하면 덜 외롭다.
다 같이 외로워서 덜 외로운 느낌?
모두 각자 본인에 맞는 방법을 선택해 외로움에 면역을 갖게 되길 바란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외로움에 역치가 높을수록 편한 곳 같으니 말이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내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읽을 때마다 몹시 외로워지다가도,
읽는 내가 직접 쓴 시인보다 외롭겠나 싶은 생각에,
갑자기 조금 덜 외로워진다.
외로움을 비교한다는 거 자체가 우습지만 이런 애 같은 자기중심적 사고가 때론 유효하다.
비슷한 위로를 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를 공유하며 이 글을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