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월생 Nov 05. 2022

다들 제각기 미쳐있는 세상

기질적으로 예민하다는 핸디캡에 대하여 자주 생각했다.
누군가 이토록 예민하다는 건, 그가 늘 화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좋은 일이 있어도 곧 화가 날까 봐 기뻐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타인을 원망하기 싫어 결국 자학에 목 졸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사랑과 우정과 일과 가정과 인격은 일단 나를 극복한 후에만 온전함을 흉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도 내가 버거웠다.
너무 높거나 낮은 나의 기준들을 맞춰 주느라 기분을 망치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밖에서 하루 종일 시달리고 온 날엔, 걸레짝이 된 체력으로 내 기분을 닦으며 밤이 저물었다.
내가 ADHD라는 이유로 1년에 몇십 번씩 이런 밤들을 견뎌야 하는 거라면, 너무 부당하지 않느냐고, 있지도 않은 신에게 말을 건넸다.


이 모든 문장을 공감하는 건 아니었다.

예민하기보단 무딘 성격에 가까워서, 삶의 어떤 순간에도 화날 준비를 하고 있던 적은 없었기에.

그럼에도 내가 이 문장을 가져온 건, 마지막 문장 때문이었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억울할 때만 말을 거는 점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부당해요!!!라고 외쳤던 모든 날 내가 받은 대답은,

'삶에서 공평한 건 모두가 불공평을 경험한다는 사실 하나란다.'였다

사실 신은 그렇게 대답한 적 없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던걸 보면 그런 세상이니 알아서 견디다 오라는 말인 게 틀림없다고 혼자 생각했다.

흥. 그래 볼게요.


인생이란 결국 일인극이니 구원자의 역할 또한 나의 몫이었다.
경험상 남에게 영웅 역할을 의탁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었다.
본인이 뿌린 슬픔은 본인이 회수하는 게 깔끔하고 옳았다.
그래서 나는 1인 2역처럼 빠른 태세 전환을 했다. 나를 욕하던 이유를 칭찬의 근거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내가 정녕 미친 미친놈 쓰레기라면, 그걸 인지했다는 점에선 가망이 있다. 대체 왜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궁금해하니 언젠가는 답을 찾을 것이다. 모든 결론은 탐구에서부터, 모든 갱생은 후회로부터 기인하니 말이다. 또 이래 버렸고 매번 이러고 있지만 어떠한가? 멋대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멋 부리길 멈추지 않는 것은 정력적이다. 자꾸 실패하고 실망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시도를 지속하는 나는 박애주의자일지도 모른다.


이 문장에는 강하게 공감했다.

특히 인생이란 결국 일인극이라 구원자의 역할 또한 내 몫이라는 말이다. 남에게 영웅 역할을 의탁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다는 것까지.

어쩜 이런 말을 이렇게나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는지.

작가는 본인 삶에 가벼운 느낌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 책으로 그 느낌을 다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가벼우나, 얕지 않다. 그래서 더 좋다.


ADHD 진단 후, 너무 충격을 받아 내게 쏟아지는 타인의 피드백을 전부 수용하려 들었다. 평판 수집가처럼 굴면서 시분초 단위로 뭔가를 개선하려 했다. 하지만 나의 큰 실수는, ADHD가 아닌 모든 인류를 정상인으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단지 ADHD가 아닐 뿐 다들 제각기 미쳐 있는 세상이다.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고,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럴 땐 우리의 주특기인 ‘잊기’와 ‘관심 끄기’를 사용해 안전해지자. 일단 안전해야 행복도 있으니 말이다.


어제 글에서 언급했던 지인이 했던 이야기와 똑같음에 놀라 하며 읽었다.

그는 내게 누구나, 너 역시, 정신과를 방문해 이런저런 검사를 받아보면 ADHD만큼 알려지지 않은 어떤 질병을 가진 것으로 판정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고 넘겼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어느 정도 공감했다.

다만, 여기서 내 자의식이 좀 드러날지 몰라 적을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냥 적어보자면,

나는 나마저 정신과에서 질병으로 분류하는 어떤 판정을 받아버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정신적으로 완전하게 건강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만약 내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건강할 수 있는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없겠다고 생각되었다.

어이없게도 꼭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류마냥, 나까지 정신과를 드나들며 세상살이가 미쳐가는 과정임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읽는 모두가 황당하겠지만, 지금도 이 생각은 유효하다.

천성 덕분에 세상이 좀 쉬웠던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 특별한 고민 없고, 짜증이 났던 대부분의 이유를 쉽게 망각하고, 무슨 일이 생겨도 액땜했다고 생각해버리는 근거 없는 자기애가 넘치는 인간인 나마저 정신과를 가야 하는 세상이라면, 그건 더 이상 인간 개인이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말세이고 종말이다. 라고 생각한다.


돈이 없어서 곤란하기도 했지만, 곤란한 일들의 범인으로 돈을 모함한 적이 훨씬 많았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범인은 다시 나였다


뼈를 맞는 듯했다.

내가 가난을 모함하고 있었음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애번 돈을 자꾸만 범인으로 몰아세우니, 돈이 내게 머물러있지 않음은 당연하지 싶다.

내 인생의 범인이 내가 되지 않게, 아직은 그래도 과정 인척 해야겠다.

경과를 지켜보며, 다른 범인을 찾거나, 범인이 필요 없는 삶을 가져야겠다.


“부모는 아이의 세계”라는 표현에 동의한다. 갑을 설정 없이, 상대적이고도 절대적으로 부모 자식의 관계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ADHD인 나도 질환 이외의 특성은 부모님을 닮았다. 생의 첫날부터 산만하고 느리게 부모라는 세계로 편입된 결과다. 나는 엄마의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고 아빠의 방식으로 소통한다. 가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지만 결국 안락한 두 분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어쩌면 내가 숨긴 제1 국적은 부모님일지 모른다.
ADHD가 유전적 결함이라 믿을 땐 부모님에 대한 존경이 떫어지기도 했다. 실패한 청소년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어쩌자고 이 지경으로 낳은 거지?’ 하고 원망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인 지금은, 부모님이 ADHD인 나를 유지 보수하는 데 열심을 다 바친 엔지니어라고 생각한다. 그때 대출한 인내를 변제할 길이 없어 매일 긴 글을 적는지도 모른다. 에세이를 가장한 반성문이 내가 망친 그들의 젊은 시절을 보상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
10여 년이 지나도록 부모의 세계를 자꾸 떠나려던 나는 고무줄의 관성처럼 여기로만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이 나의 세계가 되어 주어서, 탕아 취급을 받는 순간에도 귀할 수 있었다. 나는 긴 시간 슬퍼했으나, 긴 시간 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천해져도 부모 안에서만큼은 영원한 특권층이자 일등 시민이었다.


숨긴 제1 국적은 부모님.

존경이 떫어지기도 했다.

대출한 인내를 변제할 길이 없다.

긴 시간 슬퍼했으나, 긴 시간 천할 수 없는 사람.

이 표현들은 이 문단을 옮겨 적을 충분한 이유였다.

좋은 표현은 시간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더 많은 시간 더 오래 보고 고치기를 반복하면 글의 완성도가 올라간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혼란한 와중에도 글쓰기에 정말 오랜 시간을 할애한 듯 해 멋져 보였다.

이 멋진 작가의 글을 오늘 다 읽고 공유하려 했는데,

그러기엔 놓치고 싶지 않은 표현들이 너무 많았다.

핑계일 수 있겠지만, 내일 진짜 진짜 최종 마지막 독후감을 적어보아야겠다.


날이 너무 추워졌다.

겨울은 포근한 이불속을 박차고 어둡고 추운 세상으로 출근해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자본주의에 대한 원망이 가장 커지는 계절이다.

동시에 출근길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인류애가 가장 넘치는 시기이기도 하다.

다들 너무 기특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이 아직 굴러가는 거겠지.

오늘은 정말 여기까지만 적어야겠다. 내일도 나는 기특한 출근을 해야 하니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성인 ADHD 검사 한 번 받아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