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ADHD의 슬픔] 독후감 마지막!
아래 문단은 따로 발췌해 전혀 다른 글을 적을 때 인용할까 하다가 그냥 적어보았다.
나는 장래 희망이 가난뱅이인 사람처럼 돈을 쓴다.
저축도 없고 저축 없이 승승장구할 묘수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지출한다.
막상 잔액 부족이 뜨는 시점에는, 이 낯 뜨거운 사태를 만든 게 정녕 나인지 실감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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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상하게 카드 애플리케이션에 텍스트로 찍히는 숫자들을 돈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카드 회사가 내어 주는 한도는 부루마블 머니 같았다. 진짜 돈도 못 아끼는데 돈 같지도 않은 돈을 어떻게 아낄까? ‘카드 한도’, ‘마이너스통장’처럼 마이너스 부호를 달고 주어지는 돈들은 유해했다.
10개월 할부로 100만 원짜리 열 개를 사면 결국 일시불이라는 걸 뼛속 깊이 이해할 때까지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신용카드 자체를 비난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보장하는 혜택보다 더 많은 것을 지출하고 말 나 자신이 무섭다.
카드 쓰는 버릇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는 상황은 너무 디테일하게 상상되어 이미 지겹다.
둘째는 결제 전 ‘이걸 안 사면 사흘 후에도 생각날까?’ 한 가지만을 자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소비에 앞서 필요성, 편리함, 가성비, 재정 상황, 희소성, 재판매 가치 등을 전부 고민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질문은 나를 지루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모르겠으니 일단 사자’라는 안일한 결론으로 이끌고 갔다. 그렇게 ‘일단 사 버린’ 것들이 몇 개월 후 미개봉 쓰레기로 배출되는 것이다. 진짜 사야 하는 걸 안 사면 사흘 내내 불편하다. 잠깐 흥미를 끈 것들은 당연히 그 안에 잊힌다. 쓸모를 떠나 사흘이라는 관문을 두면 수많은 충동 소비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비의 우선순위도 잡힌다. 어중간한 것들을 포기하고 ‘사흘이나 기다릴 수 없는 것’들만 구매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스스로 단기 보상 놀이를 하는 것이다.
미치게 하기 싫어서 정말 미치겠는 일이 있을 때, 나는 내 돈을 걸고 나를 회유한다. ‘대청소하면 10만 원의 무쓸모 소비를 허락하겠다’라고, 나만이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다.
부지런히 집 안을 쓸고 닦은 후 예쁘지만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무언가를 사면 행복하다.
나는 깨끗한 집과 은근히 사고 싶던 물건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내가 이상해 보이겠지만, 돈 아끼는 일은 정상적일 수가 없다. 절약에는 반드시 어떤 무리수가 따른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무리수의 색깔을 좀 바꿔 스스로의 흥미를 끄는 것뿐이다.
소비에 대한 문제는 인생 내내 나를 따라다녔지만, 그 어떤 편법으로도 고쳐지지 않았다.
소비이자 ‘습관’이기에 개별 건수보다는 타성을 이기는 게 중요했다.
타성에 젖기만 하고 이겨 본 적은 없는 내가 너무 큰 싸움을 시작한 건 아닌가 두려워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와 싸우지 않으면 온갖 종류의 채권추심과 싸우게 될 테니 더욱 두려운 것을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억제에 대한 타성보다 무서운 분출이 세상에 너무 많다.
저자는 ADHD라는 이유라도 있지, 나는 당최 왜 때문에 이렇게 경제관념이 없을까 싶다.
누가 40살쯤 되면 통장에 100억이라도 넣어줄 것처럼 살았다.
그나마 정신을 좀 차리고 사는 중이나, 여전히 남들만큼 똑 부러지지는 못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돈 아끼는 일이 정상적일 수가 없다는 것. 절약에는 반드시 어떤 무리수가 따른다는 말이었다. 몹시 공감하며 적어왔다.
독서는 진실과 진리를 가르쳐 주는 수단 중 가장 친절했다. 오로지 내 필요만 채우고 덮어도 관계 유지에 대한 부채감을 주지 않았다. 내게 광고하거나 보채지 않고 아주 조용히, 조그맣게 존재하기만 했다. 책은 집필 과정에 담긴 수고만으로도 이미 완벽해서 내가 신경 써 가치를 찾아 줘야 할 이유가 없는 존재 같았다. 주기적으로 안부를 물어야 하는 친구도 아니고 내게 잔소리만 쏟아붓는 어른들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색하게나마 친할 수 있었다. 오래 책을 외면해도 별다른 사과 없이 그저 펼치기만 하면 화해였다.
나 역시 독서를 좀 막대했다.
만약 책에 자아가 있었다면 분명 멋대로 구는 내게서 떠나갔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엔 책 자체에 눈길도 주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또 나는 이만하면 잘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나는 꼭 해버리고야 만다.
저자의 문제점이 자기 학대라면, 나의 문제점은 자기 합리화다.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데 내가 가진 자기애가 그럴까 봐 걱정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자기애에서 비롯된 자기 합리화로 똘똘 뭉쳐진 나로 사는 세상이 타인의 것과 비교했을 때 좀 쉽다고 생각되었다.
적어도 나를 내가 본격적으로 질책하는 일은 없으며, 나 스스로를 혼자 울게 놔두지는 않으니 말이다.
우는 순간 옆에 누군가를 둔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남들이 슬퍼할 때 분노하고, 스스로를 질책해야 하는 순간 용서해버리는 천성을 가졌다.
이것에 대해서는 정리가 되는 어떤 날 한번 적어봐야겠다.
나는 남들보다 신중함의 양과 깊이가 부족해서 고생을 사서 한다.
사서 하는 고생을 세 글자로 줄이면 개고생이다.
그걸 방지하려면 선택을 해서 얻는 효용보다, 선택을 물릴 때의 비용을 헤아리는 게 낫다.
이 또한 나와 비슷해서 가져왔다.
신중함의 양과 깊이가 부족하다.
하지만 다른 점은 고생을 사서 하지는 않는다.
그 결과가 고생이기보단 경험이라고 생각해버리며, 그 경험도 내게 불편한 것이면 이내 발을 빼버린다.
어찌 보면 참 무책임하나, 스스로에게만큼은 책임감 가득한 인간이다.
선택을 번복할 때의 비용을 헤아린다는 점에서 나와 비슷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게 반가웠다.
나 역시 그 생각으로 보통 어떤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번복을 하지 않을 거라는 옵션을 두는 건 너무 리스크가 크다.
차라리 번복 시 드는 비용에 대한 생각을 미리 해버리는 게 낫다는 걸 2n년의 데이터로 깨달았다.
이렇게 오늘을 끝으로 이 책을 전부 다 읽었다.
회사를 다니는 3일 동안 읽은 이 책은 몹시 흥미롭고 좋았다. 저자는 언젠가 후속으로 [늙은 ADHD의 기쁨]을 적어보겠다고 했다. 진짜이길 바라며 기다려보아야겠다.
다음 브런치 북에서는 또 얼마나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올까 기대해보며, 독후감을 정말로 끝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