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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생 May 12. 2023

내가 본 가장 웃긴 실패담

오늘 고른 책은 [오색 찬란 실패담]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인 [젊은 ADHD의 슬픔]을 쓴 정지음 작가의 책이다.

이 책은 책장에 담아두고 조금은 아껴둔 책이다. 그 이유는 내가 이분의 책을 읽을 때 육성으로 종종 뿜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고 싶을 때 보려고 아껴두다가 오늘에야 읽었다.


한 개인의 생각의 흐름을 엿보는 일이 이렇게나 웃길 일인가? 의문을 갖고 읽다 보면, 끝에는 이건 이분만의 재능이구나 인정하며 웃게 된다.

"생각은 드는 게 아니라 하는 거야. 그냥 안 하면 돼."라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건넨 적 있는 나는 '모든 생각은 뚜껑 없이 튀겨지는 팝콘'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 저자를 보며 사람의 다양함을 배우고, 말을 조심하기로 새삼 맘먹게 만든다.


전작에서는 저자 본인의 마음과 심리상태만으로 한 권을 채웠다면, 이번 책에서는 어느 정도 본인을 다루는데 익숙해진 저자의 시선에서 보는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담는다.

무겁지 않지만, 진지하게 동시에 유쾌하게  그렸다.

저자는 사는 내내 자주 혼란스러웠고 길을 잃었었다고 말하지만, 그런 순간들에도 선함만큼은 놓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작가의 주저 없는 언어들이 좋다.

정말 술술 읽힌다.

취향이 맞다면 나처럼, 몇 번은 웃으며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나를 웃게 만든 글을 몇 개 적어두기로 한다.

기분이 다운된 어느 날 또 보러 와야지!


전업 작가로 1년여를 보내며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아무도 나처럼 무모하게 살지 않는다는 거였다. 친구들은 물론 친구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보다, 나처럼 무식하게 진로를 바꾸는 사람은 없었다.
내심 바보라고 생각하던 사람도 나보다는 자기 앞날을 챙기며 살았다. 프리랜서로 전향한 후 소원대로 잠만보가 된 나는 문득 곤궁해진 지갑을 깨닫고 온종일 인중만 긁적이고 있었다. 코 밑을 판다고 돈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손가락이라도 움직이지 않고서는 대단히 망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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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부자 상태는 오히려 금전 거지 신세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이런 입장이다 보니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하우스 푸어’나 ‘카 푸어’로 지칭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는데, 나는 그런 식으로 나를 수식할 단어조차 없는, 진실로 ‘푸어’였기 때문이다.
가끔은 최저 시급에 얽매이지 않는 형태로 근무한다는 것이, 극강의 자유인지 부자유인지 헷갈렸다.

내심 바보라고 생각하던 사람도 자기 앞날은 챙기며 살았다는 문장에서 웃었다.

'내심 바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내심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 옳지 못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여겨지는 사람을 살다 보면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이걸 이렇게 표현해 놓은 게 너무 웃기고 솔직해서 웃음이 났다.

최저 시급에 얽매이지 않는 형태가 자유인지 부자유인지 헷갈린다는 말도.



생각해 보면 매일 꿀잠을 잔다는 미치광이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저녁 열 시에 잠들어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는 사람은 미치고 싶어도 미치지 못한다.
그의 수면이 그를 건강하게 껴안은 채 절대로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을 못 자는 사람은 단 3일 만에 사이코가 되고 만다.
도덕과 더덕, 법과 밥, 사랑과 사망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자신의 힘으로는 잃어버린 선善을 복원할 수 없다.

요즘 나 역시 수면이 불규칙해졌기에 이 문장을 가져왔다.

사실 수면 자체에 문제가 있던 적은 없었어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정신 차리고 잘 시간 되면 딱 자야겠다고 재차 맘먹었다.

이 책의 1 실천은 수면시간 잘 지키기.


약속을 지키는 연습을 하고 있다. 호언장담해 놓고 나중에 농담이었다는 듯 뭉개는 습관을 없애려 고군분투 중이다.
이십 대엔 이보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살았던 것 같은데, 삼십 대가 된 후론 삶의 목표가 전부 유치원생 수준으로 퇴행했다.
밥 꼭꼭 씹어먹기, 너무 늦게 자지 않기, 만화 오래 보지 않기, 손발 잘 씻기 등등.
어쩌면 사람은 이십 대 중반부턴 다시 한 살이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나이 셈법대로라면 난 여섯 살인데, 그렇게 따지자면 내 유아적인 인생 목표들도 어쩐지 의젓해 보인다.

요즘 내 목표는 '화장실 참지 않기'와 '배부르기 전에 수저 놓기'이다.

내 것도 못지않게 유아적이어서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십 대 중반부터 다시 한 살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어서.


나는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에서 해방되는 가장 쉬운 방식이 포기임을 배웠다. 어느 시점부터는 결혼이나 내 집 마련, 고급 승용차에 대한 미련도 놓아버렸다. 나만 이런 상황이라면 능력과 노력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친구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왜 나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도, 앞선 출발선을 밟고 먼저 쏜 사람도 함께 힘든 걸까? 어째서 열심히 살수록 제자리를 지키기도 버거운 것인지. 의문을 쫓다 보면 아무 대책 없는 내가 초라해졌고, 결국 억하심정에도 지겨워져 무감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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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에 대한 불안은 전쟁 경험, 기아 문제처럼 집단 전체에 뿌리내린 고통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인스타그램을 켜면 내 또래의 누군가는, 또래인 게 놀랍도록 부자다. 우리는 젊은 셀럽들의 삶을 언제 어디서나 엿보며, 진짜 부자들에겐 돈에 더해 시간이란 재화까지 넘친다는 걸 알아간다. 
사회에 나온 밀레니얼들은 학교에서 배운 평등이 거짓임을 깨닫는다. 
세상에는 교재에 명시되지 않은 계급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면, 오로지 경쟁으로 얻어내야만 하는 서글픈 왕관이 있다. 이후에는 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이 무기가 된다. 
체력과 정신력과 시간을 한계까지 끌어올려야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때로 탈진 직전까지 와서도 저 자신을 멈출 수 없고, 마침내 의사로부터 몸이나 마음이 고장 났다는 판정을 받는다. 그것이 바로 번아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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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고통은 기성세대의 몰이해 속에서 더더욱 깊어진다. 어떤 쟁점도 실제 일어난 전쟁이나 대규모 경제 공황만큼 끔찍할 순 없다는 이유로, 출생 연도 자체가 특권이란 꾸지람을 듣는 것이다.

밀레니얼에 고통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전쟁도 가난도 경제공황도 경험하지 않은 세대인 건 맞아서, 이게 뭘까 싶다.

사람을 살아있을 수 없게 만드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6.25나 5.18 같은 시대적 사명에서 한걸음 벗어난 세대인 건 맞는 듯 하니.. 어렵다.


어쩌면 미래의 내가 아득바득 타임머신을 구해 도망쳐 온 시점이 지금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잿빛이던 오늘도 갑자기 청량한 투명색이 되고, 마음속 겨울에도 새순이 돋아나는 기분이다.

아득바득 나는 지금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상식적으로 서른에도 낙인을 찍는 사회가 마흔, 쉰, 예순, 칠순, 팔순…에 관대할 순 없다.        
또래 친구들을 예로 들자면, 보통 둘 중 한 가지 태도를 보인다. 나이 듦을 경멸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는 이는 자신의 나이를 외면한다. 두려워하는 이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자꾸 어려지고자 시도한다.
나는 이러한 인식과 행동들이 노인 소외, 노인 혐오 문제를 대하는 시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우리 시대 노인들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을, 은연중에 ‘낡아버린 인간들이 감내해야만 하는 대가’로 만들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인터넷 세상에는 노화로 인한 신체 능력 감퇴를 조롱하는 신조어들이 많다. 
구태여 적지는 않겠지만, 조악한 혐오의 말들이 노인들이 받아야 할 배려와 존중 자산을 좀먹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누구나 늙는다는 절대 진리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유독 노인들을 배타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나 반성을 해볼 때다.

당장 지금은 나이 듦을 희화화하는 말들을 멈추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누군가는 하다못해 사소한 유머까지 검열하며 살아야 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유머는 바로 그 사소함 때문에 힘이 세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일을 일회성 웃음의 소재로 삼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문제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우스워진다. 사안의 본질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머에는 웃음 이상의 힘이 담기기에, 오히려 유머에 대한 성찰과 자중이 필요하다.

나도 부디 밈이나 유행이라는 이름아래 특정 집단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바란다.

그런 말들은 사소하기에 힘이 있다는 말에 공감했다.

모두가 언젠가 노인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면 좋겠다.


연애 상담은 고민 상담 자체를 좋아하는 내게도 다소 버겁고 보람 없는 일이었다.
이상하게 누구든 연애 문제에서는 자기 멋대로 하기 위해 남의 의견을 묻곤 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이해하진 못했다. 그러나 둘 사이 연애란 어차피 내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이해한 참이었다.

자기 멋대로 하기 위해 남의 의견을 묻는다는 표현이 너무 찰떡이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애 상담을 얼마나 많이 해주었으면 이런 문장이 떠오를 수 있었을까, 신기했다.


심리 상담이나 인간관계론에서는 현재의 마음을 상대에게 정확히 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부터 진심이 능사라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때로는 상대방이 건네는 묵직한 진심들이 정말로 무거워서 끔찍할 때도 있었다.
그 무게감에 몇 번 허덕여본 후에는 자연스럽게 내 진심을 감추는 법도 터득했다. 나이가 들수록 농담만 늘어가는 이유도, 주변인들에게 나라는 무거움을 선사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의외로 누군가와 잘 지내는 데에 꼭 진심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인간관계를 지탱하는 요소는 그보다 단순하고 명료했다. 관계와 상황에 맞는 예의, 약간의 미소 정도면 누구와도 충분했다. 이것은 거짓이라기보다 또 다른 차원의 진심이었다.
단지 나에겐 상대에게 진심을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최상위의 진심이라 그렇다.

저자와 동기는 다르지만, 마지막 행동이 똑같다.

주변 사람들의 삶에 나까지 무게를 보태고 싶지 않다는 마음.

반대로 나 역시 그들의 무거운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지는 않다. 한다면 말리지야 않지만 말이다.

그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떠올리면 웃음이 나는 순간 하나를 더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혹시 이게 MZ인 걸까..?


내 일상은 깨끗해지고 밝아졌다. 환경이 개선되니 내가 코로나 장기화에 많이 지쳤었다는, 당연하지만 외면해 왔던 사실을 두려움 없이 인정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보지 않아도 좋았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나를 한 조각 내어놓는 것만으로도 세상과의 단절감이 놀랍도록 희석되었으니까.
보이는 삶이 전부는 아니지만, 보려고 해야 보이는 삶의 일면도 있다고, 당신은 아마 당신 삶의 가장 열렬한 독자이자 구독자일 거라고 말이다.

위의 이유로 유튜브를 추천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를 찍어 보는 일이 재밌다니. 생각만 해도 뭔가.. 찜찜한데 말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은 일리 있었다. 나는 대화하는 나를 볼 일이 없는데, 내가 평생 마주할 일 없는 나를 마주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니까.. 나도 만약 유튜버가 된다면 기꺼이 내 열렬한 구독자가 될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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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예상 그대로 재밌고 유쾌한 책.

친구를 만나고는 싶은데 동시에 나가기 귀찮을 때, 읽기를 추천하고 싶다.

마치 친구를 만나고 온 듯 즐거워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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