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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생 Nov 11. 2022

나의 첫 독립 후기

수년 전 입사한 내 첫 직장은 인천공항이었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출퇴근은 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지원했고, 덜컥 합격해 다니게 되었는데 막상 며칠 다녀보니 왕복 4시간의 지하철이 얼마 큼이나 삶의 질을 하락시키는지만을 절실히 깨달았다.

자취에 대한 생각도, 기대도, 로망도 없었지만 공항철도 한 시간, 1호선 환승 후 집까지 한 시간의 통근을 하루빨리 그만두기 위해 신속하게 집을 알아봤다.

그렇게 나는 입사 보름 만에 첫 자취집을 구했다.


정말 갑작스럽게 시작된 독립이었다.

높은 층의 오피스텔이었고 덕분에 공항이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2n 년 일생에서 온전한 내 것으로 가져본 공간 중 가장 넓고 좋았다.

이케아를 네 번이나 드나들며 구매와 교환을 반복했고, 그렇게 퀸 사이즈 침대와 6인용 식탁 그리고 소파와 소파 테이블까지 갖춰놓았다.

그럼에도 그 집은 뭔가 허전해 보였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건 방이기 보단 하나의 큰 거실이었다.

넓어서 좋았지만, 그 공간의 대가를 살아가는 내내 관리비로 치루어야 함을 그때는 몰랐었다.


그 집에서 셔틀버스를 타면 공항까지 10분 남짓.

통근시간이 무려 4시간이나 줄었으니 이젠 내 시간이 참 많아지겠다 생각했다.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 없는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동안의 내가 오롯이 개인적인 일에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하게도 부모님이 내 몫의 살림을 대신해주셨기 때문이었음을 여실히 실감했다.


밥은 때가 되면 식탁에 준비되는 게 아니었고, 빨래는 빨래통에 넣어놓으면 깨끗하게 옷장 속에 접혀있는 게 아니었다. 화장실의 물때는 존재감을 매번 드러냈고, 바닥은 반나절이라도 닦지 않으면 머리카락이 쌓여갔다.

심지어 쓰레기조차도 휴지통에 넣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전용 봉투를 사서 옮겨 담은 후 일층에 내려놓아야 비로소 끝이었다.

퇴근을 하고 오면 해야 할 일이 매일, 정말 매 초마다 생겨났다.

일단 밥을 먹는 것부터도 숙제였다.

그 집을 비워두는 날이 너무 많았기에 냉장고 전원을 애초에 꺼두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가스비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 가스가 잠겨있었는데, 굳이 풀어달라고 하지 않아 가스레인지도 사용할 수 없었다.

전자레인지와 커피포트 정도가 요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들이었는데,

사실 나는 애초에 냉장고를 꺼두고 가스를 그대로 잠가놓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요리를 할 마음이 없던 거였다.

요리다운 요리를 할 줄 모른다는 것도 큰 이유였겠지만 무엇보다 음식물 쓰레기로 인해 꼬일지 모를 벌레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을 자주 비워둬서인지 혹은 가구에 비해 넓은 집이 문제였던 건지, 그 집에선 유독 먼지가 눈에 띄었다.

아무리 깨끗이 사용하고 닦기를 반복해도 돌아서면 또 한가득 나오는 먼지들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오피스텔의 특성상 작디작은 창문은 집을 환기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때문에 화장실은 사용할수록 물때의 흔적으로 가득해졌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살아온 만큼의 청결함 속에 살기 위해서는, 매일 적어도 한 시간 이상 청소에 시간을 소요해야 함을 알았다.

깨끗하게 사용하는 건 소용없었다.

착실하게 쌓여가는 먼지는 청소만이 답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포기했던 건 먹는 부분이었다.

하루에 한 번은 직원식당을 이용했고, 두 번째 식사는 인스턴트로 때우게 되었다.

10분밖에 안 걸리니까 직원식당을 다녀올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퇴근을 하고 조금 쉰 후 밥을 먹기 위해 다시 일터로 나가는 일은, 끼니를 포기하는 것보다 큰 노력을 요구했다.

직원식당이 맛있었다면 또 모를까, 하루 두 번 먹을 음식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건 청소였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생활을 했고, 먼지는 보이는 즉시 닦아냈다.

루틴처럼 매일 19시 알람이 울리면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좀 강박적이었던 것도 같다. 여하튼 그때는 환기까지 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침대에 눕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했다.

퇴근하고 이런 것들을 해내다 보니 빔프로젝터를 틀어 영화를 본다던지 어학공부를 한다던지 혹은 친구를 초대하는 등의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빔프로젝터에 쌓일 또 다른 먼지가 두려웠고, 어학공부를 할 여력 같은 건 없었다.

친구를 초대하긴 했지만, 친구들이 다녀 가면 그 이후에는 혼자 남아 해야 하는 청소의 시간이 몇 배는 늘어난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는 그마저도 빈도를 줄여나갔다.

맥시멈 라이프를 지향했던 나는 '먼지'라는 뜻밖의 이유로, 적어도 인테리어 부문에서 만큼은 미니멀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도 이 가치관은 유효하다.

가구를 고르는 가장 첫 번째 기준은 '한 번에 쓱 하고 먼지를 닦아낼 수 있는 심플함' 일 정도이다.


“I am what I eat.”

모순적이게도 내 자취의 교훈은 이 문장이었다.

인스턴트를 자주 접하는 식단이 문제였던 건지, 일주일의 반을 안 먹다가 본가만 가면 했던 폭식이 문제였던 건지, 역류성 식도염과 소화불량 그리고 고지혈증이 같이 찾아왔다.

그 나이에 고지혈증이 온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그 어려운걸 나는 자취 1년이 안돼서 해낸 것이다.


해당 이유로, 그렇게 나는 자취를 끝내게 되었다.

건강이 무너져버린 나를 위해 부모님이 조금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와주시기로 결정해주신 덕분이었다.

1년 남짓한 자취를 통해 나는 아주 호되게 깨달았다.

자취는 혼자 사는 자유로운 삶이 아닌 내가 나를 먹여 살리고, 내 집을 돌봐야 하는 그런 일이라는 사실을.


자취를 끝낸 지금 그때가 눈곱만큼도 그립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청소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 환기된 공기를 마시던 때를, 도어록을 누르고 한 발짝만 들어오면 느껴졌던 편안한 기분을, 그곳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며 내 공간을 나누던 그때를 나는 종종 그리워한다.

동시에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고 집에 와 온종일 소화불량으로 인해 아파했던 것, 아주 작은 소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날 정도로 긴장 속에서 지냈던 것, 생활소음이 들려오지 않는 적막을 애써 없애려 음악을 틀어놓았던 것들을 생각하면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내게 자취를 해볼까를 묻는다면 나는 한 번쯤은 꼭 해볼 것을 권한다.

가족과 살며 살림의 기회가 본인에게 까지 오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개인적으로 자취 이후 결혼관이 '혼자 살며 집안일을 해본 사람'으로 바뀌었을 정도이다. 적어도 어떤 것들을 해야 집이 집으로 유지되는지, 살림을 아는 사람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자취를 한다고 모두가 나처럼 청소에 강박을 가진 채로 사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빨래를 하고 밥을 차려먹고 쓰레기를 버려내야 한다는 사실은 다 알 테니 말이다.


독립 전 20년 넘게 집안일을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부끄러워 이 글의 발행을 잠시 망설였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그냥 올려본다.

무엇이 안 그렇겠냐만은, 자취의 로망은 자취를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닌, 부지런한 사람의 특권이라는 것을 강하게 실감하며 끝이 났던 나의 첫 독립 후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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