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나무 그늘 아래, 콜라와 나의 시간

by 노란민들레

괴정동 골목의 조용한 주택가 사이에 옛 빨래터였던 작은 공원이 있다.
샘터공원이다.
언뜻 보면 오래된 동네 쉼터 같지만, 나에겐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소중한 안식처다.

이 공원 한가운데에는 500년을 살아낸 회화나무 몇 그루가 늠름하게 서 있다.
언제나처럼 굳건히, 아무 말 없이 제 자리를 지키는 그 나무들은 콜라와 나에게 늘 묵묵한 위로가 되어준다.

그 곁에는 아직도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작은 샘터가 있다.
동네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예전에는 이곳에서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정자와 운동기구, 빨래터가 놓인 이 자리에서, 사람들은 반려견과 함께 잠시 쉬어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르신들의 담소가
어우러진다
나는 우리 집 반려견 콜라와 함께 이 공원을 10년 넘게 걸었고
사계절의 공기를 함께 맞으며,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정을 쌓아왔다.
"오늘도 오셨네요."
누군가의 반가운 인사 한 마디가,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 나에게 따뜻한 보상이 되어 돌아온다.

콜라는 열세 살 된 보더콜리다.
나보다도 먼저 이 길을 걷고 싶어 할 정도로, 이 공원은 콜라에게도 특별한 공간이다.
사람들의 체취와 친구들의 냄새를 맡고, 한가롭게 앉아 쉬며 시간을 보낸다.
그 곁에서 나는 운동기구에 몸을 기대어 이것저것 움직이며 근육을 단련해 본다.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이 더 끌리는 사람들은, 지치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다.
낮에는 병든 어머니를 돌보고, 밤에는 폐지를 줍는 중년 여성.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배달일을 하는 검게 그을린 아저씨,
자식 없이 홀로 지내는 마음 따뜻한 할머니, 졸업 후 방황 중인 순수한 청년.

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때로는 몇 마디 말로 하루를 마무리하다 보면
내 마음은 어느새 조금 가벼워지고, 깊어지고, 따뜻해진다.

그런 날이면, 예전 국어 강사 시절, 학생들에게 들려주던 정호승 시인의 시 한 편이 자주 떠오른다.

<슬픔이 기쁨에게>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힌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이 시를 읽을 때면, 마치 내 안의 슬픔도
조용히 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슬픔이란 단지 울음으로 끝나는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깊고 따뜻한 감정이다.
흘릴 줄 모르는 눈물을 위해 기다림을 주겠다는 말은,누군가의 슬픔에 다가가기 위한 인내의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오늘도, 따뜻한 슬픔을 안고
샘터공원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의 삶은 모두 다르지만
서로에게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되어 간다.
정답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고, 웃어주고, 손을 흔드는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게는 하나의 ‘위로’가 된다.

그리고 콜라와 함께 걸어온 이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알고 살아가는 나의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따뜻함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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