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 전대미문의 커플 메이킹 호텔! 이곳에선 사랑에 빠지지 않은 자, 모두 유죄! – (‘더 랍스터’ 시놉시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세계관을 다루는 법을 좋아한다. 신화적인 발상에서 창작해낸 뒤 개연성을 고려한다기보다는, ‘나는 이런 세계관에서 이야기를 할 거야.’ 하고 드러내놓는 방식이 좋다. 다른 곳에 적용해보거나, 홀로 정리를 하기 위해 분석적으로 따져 보면 참 허점 많고 여백 많은 세계관이다. 그러나 영화의 서사를 전개하기엔 문제가 없고, 감상을 마쳤을 때 메시지를 느끼는 데 어려움이 없다. 게다가 초월적으로 느껴질 만큼 신비롭고 신선하기까지 하니, 보기 드문 고유성과 개성에 감탄하게 된다.
‘더 랍스터’는 블랙코미디 장르로, 독신을 부정하는 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어딜 가든 부부가 동반하여 움직여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호텔로 연행된다. 독신이 된 사람들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45일간 새로운 파트너를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한다. 무분별히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파트너가 되려면 선천적 공통점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데이비드는 난시라는 공통점을 공유하던 전처에게 이혼 선고를 받고, 입소 첫 날 말한다. 실패한다면 랍스터가 되겠어요. 바닷속에 살고, 아주 장수하며, 평생을 번식을 하며 살죠.
- 1. 옳다, 그르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다. -
영화는 나의 기준에서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는 혼밥 문화가 완전히 정착했고, 1인 가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이 시대에서 ‘혼자’가 금기시된 세상을 그려냈음에도 불구, 정서적 따뜻함이나 간절하고 공감하기 쉬운 로맨스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주목할 것은 연출인데, 현악기로 거칠게 연주된 배경음이 간간히 나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 외에 음향삽입은 차분한 저음의 여성 나레이션이 전부이며, 전지적 시점으로 데이비드의 행동을 읽어낸다. 독특한 세계관을 뒷받히는 시스템들이 뒤이어 등장한다.
호텔 입소 전 그는 동성애자, 이성애자 중 한 가지를, 유니폼 치수 44사이즈와 55사이즈 사이에서 또 한 가지를 골라야 한다. 중간 선택지는 없다. (란티모스의 이분법적 세계관) 분명 45일이 지나야 동물이 된다고 했거늘, 호텔 내 투숙객들을 다루는 태도 역시 가축을 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위 행위는 금지되고 (어길 시 토스트기에 손을 넣는 벌을 받는다- 성인에게 이런 형벌이? 지나치게 비인간적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목줄 같은 벨트를 잠에 들 때에도 예외 없이 착용해야 하며, 주기적으로 숲에 가 사냥을 한다. 대상은 호텔에서 짝을 찾지 못한 ‘도망자’들이다. 숲에 숨어 사는 그들을 마취총으로 사냥해 올 때마다 인당 하루의 유예 기간을 번다. ‘감정을 못 느끼는 여자’는 이백명 넘게 사냥해 호텔의 보기 드문 장기 투숙객이었다. 데이비드는 자신도 싸이코패스인 시늉을 하며 그녀에게 접근했지만, - 그는 깨달았다.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감정을 숨기는 것보다 힘들다는 걸. - 자신의 형이었던 개를 그녀가 발로 차 죽이고 나자 결국 눈물 흘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숲으로 도망친다.
이러한 1부에서 주목할 점은 세 가지로 구분된 공간이다. 사회, 호텔, 그리고 숲. 사회는 자격을 취득한 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고, 호텔은 이가 보류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기회 내지 불행이다. 작품을 살펴보며 나는 불교사상의 연옥을 떠올렸다. 능동성을 요구하나 시스템 아래에서 투숙객들은 가장 수동적이고 비참하며 절박하다. 으레 인간이란 권리를 앗기면 비루하고 절망적이 되기 마련이다. 그 예로, 데이비드의 두 친구 중 한 명은 코피가 자주 나는 여자에게 대쉬하기 위하여 자신의 코를 억지로 내리쳐가며 그녀와 가정을 꾸려 간다. 데이비드는 그런 그가 거짓되었고 또 어리석다고 욕하지만, 다수가 따르는 사회에 순종하기 위해 거짓을 꾸며내려는 그를 누가 마음 편히 욕할 수 있으랴.
로맨스는 사치요, 조건만을 따지며 배우자를 골라야 하는 사회. 여기서 아차 싶었다. 어떠한 기시감이 들지는 않는가? 기이하게도 우리 살고 있는 사회와 커다란 차이점이 없다고 느껴졌다.
-2. 사랑이란 어떠한 합의점을 마련하지 않으면 영속될 수 없는 것 -
비단 사랑이란 대서사시 없이도,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는 ‘조건’ 맞춤형 인간이 되려 애쓴다. 몇 달 전 인터넷에는 ‘지하철 정거장 소개팅’법을 소개하는 글이 유행을 끌었다. 서로 지하 철 역 맞은편에 서서, 이름은? 학력은? 연봉은? 하며 질문을 주고받다가, 마음에 들면 교통카드를 찍고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편리함을 빙자한 지나치게 고독한 이야기였다. 재미있다는 반응만 이어지는 댓글 창을 죽 내리면서, 나는 그들 중 자기확신을 가진 사람들-그러니까 자신이 상위에 속하여 거부당할 염려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의 비중을 차지할까 가늠했다. 자신의 비루함을 다수와 함께 웃는 것으로 애써 외면했을 설움을 생각해본다. 그러나 사회는 이러한 적립된 우울을 제대로 살펴볼 시간조차 넉넉히 주지 않는다. 무한 경쟁 사회 아닌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동안 누군가는 꿈을 이루고 있다는 문장에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하며 이불을 걷어내고 펜을 쥐어야 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는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점차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게 되는 성 싶다.
순수한 로맨스의 시대는 갔다고들 한다. 결혼 중매 회사가 유행하고, 휴대폰 어플로 연애를 전제한 만남을 가지는 것부터, 심지어는 거부 당할 염려 없이 섹스 상대를 온라인으로도 구직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필립 허드슨은 “쓰고 버리는 인스턴트 만족의 문화”로 이 현상을 명명했다. 선택에 목숨까지 각오했던 과거를 갑옷, 현대를 솜옷으로 비유하며, 이제는 모든 것들이 너무 약속하기도 져버리기도 쉬워졌다고 말한다. 사랑이 생존의 수단인 것은 ‘더 랍스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애정 없이 미래를 약속하고 서로의 부속물들을 취한다.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 3. 사랑은 시스템과 충돌하는 것, 광장에서든, 밀실에서든. – 이동진 평론가 -
내가 이 영화를 2부로 나누는 기준은 나레이션에 포함된 단 한 문장이다. “그리고 나는 데이비드를 만났다.” 그 순간 나레이션은 만화로 따지면 설명란에 지나지 않던 위치에서 한 순간에 중요 인물의 발화로 전환된다. 순식간이고도 효과적이어서 연출법에 탄복하게 만든다. 나레이션의 글을 쓴 여성은 도망자 신세로 데이비드와 같이 난시를 가졌다. 그러나 숲에서도, 도망자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규칙은 있었다. 도망자 대장은 사랑에 빠지는 것을 금기시했다. 호텔 안에선 강제로 왈츠를 춰야 했지만, 이들은 축하할 일이 생기면 각자 헤드폰을 끼고 홀로 춤을 췄다. 각자 다른 곡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그들 전경은 나로 하여금 꼭 햇빛 아래에서 다 다른 관절 춤을 추며 자라나는 콩나물 묶음을 연상시켰다.
여기에서 란티모스가 심어놓은 한 가지 장치 더. 작중 동물이 정말 자주 출연한다. 오프닝부터가 사정이 있는 듯 염소를 쏴 죽이는 여성. 그 다음에는 이미 개가 된 형, 그 외에도 데이비드와 만남을 가졌던 인물들이 등이 동물로 변한 것까지 보여주며 세계관을 더욱 깊이 각인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숲속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들은 꼭 모두 전사를 지닌 인물로 보인다는 점이 재미있다. 이전 비평학자 노스럽 프라이는 서사적 양식 중 로맨스-비극의 특징 중 하나로 주로 동, 식물이 등장하는 자연이 배경이란 것을 꼽았다. 란티모스가 신화적 연출을 의도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징표이다.
숲속의 규칙 여부와 관계없이, 데이비드는 하필이면 그녀에게 사랑에 빠졌고 그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요 물품을 사러 시내에 가느라 가짜 부부 행세를 할 수 있을 때야말로 대장 앞에서 서로의 몸을 탐하며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증오했던 시스템의 복원을 꿈꾸면서까지 사랑의 귀결을 염원하는 아이러니. 결국 둘은 도주할 계획을 세운다. 허나 애초에 나레이션을 진행하고 있던 것은 근시 여인이 아닌 도망자 대장이었다. 여인의 다이어리를 발견하고 그들의 사랑과 도피 계획을 알아차린 그녀는, (나레이션 = 근시 여인의 다이어리를 낭독하고 있던 것.) 근시 여인을 시내 안과로 데려간다. 그리곤 그녀를 실명시킨다.
사랑이 좌절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위대한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고마움’을 사랑하는 상대에게 이를 표현하지 못할 경우, 우회하여 내뱉는 감정이라 정의했다. 더 이상 사랑하는 타자를 욕망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막대한 절망감을 느낀다. 이반 투르게르푸의 소설 ‘무무’에서 농노인 주인공은 여주인이 자신이 사랑한 여성을 다른 남성에게 시집보내 버리자, 자신의 강아지를 직접 물에 빠뜨려 죽인다. 자신이 더 이상 사랑을 향유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스스로가 비루함을 깨달을 때 인간이 가진 선택지는 얼마 없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지속하여 파멸의 길을 걷거나, 혹은 상황을 즉시 종료시켜 후행될 불행을 단기간에 압축해 겪어야 한다. 도망나가는데 성공했으나, 이제는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동일한 조건을 공유할 수 없게 된 이 커플은 어떤 방법을 택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데이비드의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의 시야에는 눈이 먼 사랑하는 여인이 보이고, 그녀는 그에게 앞으로 익숙해질 것이라 위로한다. 그는 칼을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거울을 응시하는 그의 숨소리가 거칠다. 이가 고조되더니, 한 순간에 화면은 암전된다. 시청자들은 두 가지 결말로 이 엔딩을 해석하는데, 서사의 진행이 거기서 멎었다는 파와 (화장실에서 도망칠지 말지 갈등하다가 끝남.) 데이비드가 제 눈을 파냈다는 파가 있다. 나는 후자에 더 힘을 싣고 있다. 이분법적 사고를 강조한 이 영화가 열린 결말을 낸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모순 아닌가. 갑작스레 시야의 암전이 연상되는 연출을 넣은 것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고서야 구태여 그럴 리 없다는 결론이다. 애초에 사랑에 거대한 이상을 지니고,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가기에 초월이 가능하다고 굳게 믿는 나는 다른 결말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비극을 다시 느껴야 한다면, 차라리 눈을 파내고 시력을 잃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게 다가온다. 영화를 좋아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살펴 보고 싶어진다. 목격한 감상들 중에서 이러한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일부러 코피를 내는 것과 스스로 눈을 찌르는 것. 뭐가 다른 걸까.’ 그렇다. 당위성을 찾아야 하는 사랑은 결국 어떻게든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결국 어리석음으로 치부했던 동료의 로맨스가 데이비드에게 와 닿으니 숭고한 희생처럼 연출된다는 점이 재미있다. 실상은 결국 사랑을 성사해내고픈 욕망에서 일맥상통하는데도, 하여튼 관점을 다루는 데 마법적인 능력이 있는 감독이다.
이 시스템 속에서 사랑을 ‘성사해낸’ 일반인들은 상호 조건에 부합하는 상대를 찾아가며, 선천적인 공통점을 만들어내기 위해 상식에서 벗어난 기행을 벌이기도 하고, 이성적으로 원치 않는 상대에게 플러팅을 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짐승의 사회 아닌가? 사랑을 성사하지 못해 동물이 된 자들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신화적인 배경을 통해 감독은 공통점만을 찾아내려 애쓰는 인간이, 결국은 전혀 합일될 수 없는 객체이며, 책임질 수 없는 저마다의 마음을 버려야만 시스템에 적용될 수 있다는 비극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다.
‘아, 너와 있으면 조금 더 비로소 내가 되는 것 같아.’ 하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정말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있을 때, 편안해지고 다정해지는 나의 모습에 당황하여 기뻐하며 떠올린 마음이었다. 조금 떨어져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가 그를 열렬히 사랑하기 위해 더 긍정적이고 나은 사람이 되고자 변화한 것이었다. 원래의 나에게 잘 발현되지 않던 속성이, 사랑 앞에서 그를 향한 인정 욕구를 통해 뛰쳐나온 거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 상황에서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되었다, 가 아닌 변화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본질 속성이든 아니든, 그 순간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반면 상황이나 환경이 비극적일 경우 로맨스는 쉽게 좌절된다. 상대를 위해 변화하는 것도 부정적일 때가 많으며, 우리는 그것을 자기희생이라 부른다. 그러나 실은 아주 자의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 역시 이기성에서 비롯된 - 이만큼 희생하였으니 나에게서 떠나가지 말아달라는 방어기제 – 것이 아닐까. 데이비드가 맹인이 된 순간 여인은 영영 데이비드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둘은 사랑이 식을지언정, 마음이 가라앉을지언정 서로를 생존 수단으로 여기며 영영 귀속될 것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조건을 내 건 이 영화는 슬프다. 후천적으로 맹인이 된 두 사람의 로맨스를 응원하는 것도, 그러지 않는 것도 모조리 슬프다. 사랑은 쉽게 내몰린다. 조금의 가혹성에도 인간은 쉽게 휘둘린다. 그것을 대처해나가는 것도 인간의 몫, 뿌리치고 제 삶을 영위할 힘을 찾는 것도 인간의 몫이라지만. 사랑을 믿는 것이 슬픈 일이라면 나는 더 슬퍼하고 싶다. 사랑은 시스템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든 밀실에서든.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가장 첨예한 밀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