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부터 스톡홀름까지
세계 어디에나 있는 공간들. 슈퍼마켓, 악기 상점, 분수가 있는 공원, 또는 맥도날드...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도시를 배회하며 낯설어 하다가도, 멀리서 풍겨오는 익숙한 기운을 맡고 반갑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들. 하지만 이런 공간들 중에서도, 나에게만 유독 친숙하고 가슴이 뛰는 세계 공통의 '아지트'같은 곳이 있으면 더 좋을 거라고 늘 생각해왔다. 스톡홀름에서 만난 남자는 여행지에서 꼭 한번씩은 헬스장에 가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아직 초보 여행자인 나에겐, 아마도 레코드샵이 그런 공간이 아닌가 싶다. 세계 어느 도시에나 있지만, 이름도 인테리어도 다르고,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은 조금씩 혹은 완전히 다르다. 물론 슈퍼마켓도 그렇고 악기 상점도 그럴 것이고, 하물며 진부한 기념품샵도 그럴 테지만 레코드샵은 그곳을 가꾸어 나가는 주인의 정성이 있기에 더욱 큰 특별함과, 특수성을 가진다. 음악에 대한 지식과 애정, 그리고 꾸준한 관심이 없다면 절대 꾸려나갈 수 없는 멋진 공간이니 말이다. 선택지가 많지 않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서울의 레코드샵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음에도 포기는 할 수 없는 나에게 유럽의 레코드샵들은 보물이 가득한 비밀의 숲처럼, 판타지적인 세계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런던의 <러프 트레이드>로 대표되는 유명 레이블 산하의 레코드샵은 규모부터 남다르다. 이번 여행으로써 두번째로 방문한 이스트 지점의 경우 최신의 음악 동향을 알아볼 수 있는 큐레이팅과 각종 플랫폼 서비스를 즐길 수 있음은 물론, 공간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 간간히 인디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세계 각지에서 이곳을 위해 런던을 방문하는 음악 애호가들이 적지 않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곳. 만약 내가 런던 시민이었다면 음악의 늪에 몸을 파묻고 싶을 때마다 이곳을 뺀질나게 드나들었을 것이다. 무언가 사야 한다는 일말의 부담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개방적 분위기까지 갖춘, 아주 멋진 공간이다. 내가 유럽에서 처음 경험한 레코드샵도 바로 러프 트레이드 이스트였던 만큼, 놀라움으로 가득한 이곳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짙게 남아있다.
노팅힐에 위치한 웨스트 본점은 런던을 두 번째로 찾았을 때 방문했다. 보통의 개인 레코드샵처럼 작은 규모인 데다가 중고 상품을 다루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스트 지점보다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거칠면서도 아늑한 분위기, 옛 것과 새 것이 자유롭게 어우러진 산뜻한 장소감. 음악과 낭만주의에 빠진 80년대 영국 10대의 방을 볼 수 있다면 이런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후 유럽에서 스무 곳이 넘는 레코드샵을 전전할수록 자연스럽게 애정이 더 향하게 되던 쪽은 개인의 레코드샵이었다. 협소한 공간, 곧 천장까지 닿을 듯 벽면을 둘러싼 기다란 책장들, 모든 장과 진열대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방대한 양의 CD와 바이닐들. 개인 상점이라고 해서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겉으론 소규모로 보일 수 있을지라도, 모든 곳이 필연적인 시간의 흐름을 타고 주인장의 순수한 애정이 농축된 컬렉션으로 채워진, 속이 뜨겁게 부풀어오른 공간이기에. 비닐에 포장되어 아직 때 하나 타지 않은 통통한 바이닐들이 카운터나 매장의 입구 쪽의 '새 상품' 진열대에서 여러 사람의 손길을 맞이한다. 그러나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이미 하나의 혹은 수십 명의 손을 거쳐 간 중고 음반들. 구석진 벽면 책장에 위치해 있는 그들은 각자의 세월을 머금은 채 제 자리에서 고결한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최대한 많은 바이닐을 꺼내 그들과 마주하고, 마음 속에 들어온 몇몇을 팔과 품 속에 소중히 끼우는 것. 그리고 물 건너의 머나먼 내 방까지 무사히 데려갈 채비를 하는 것.
비가 대차게 쏟아지던 코펜하겐에서의 마지막 날 오후, 모든 아쉬움을 버리고 나만의 즐거움을 찾아 향한 <사운드 스테이션>은 지금껏 가본 레코드샵 중에서 가장 방대한 양과 넓은 카테고리의 바이닐이 들어서 있었던 곳이다. 가게 이름 그대로 '스테이션'과도 같은. 취급하고 있는 음반의 양을 놓고 본다면 '뮤지엄'이라고 작명했어도 무방했겠지만, '스테이션'이라는 이름은 왠지 곱씹을수록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래, 나는 지금 '바이닐 스테이션'에 갇혀 있는 거야. 매장의 구조는 길 잃기 쉬운 기차역과 같이 조금 독특했다. 들어서면 저편에 또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그 방에 가면 또 다른 방으로 갈 수 있는 식이다. 입구에서 보는 것과 달리 매우 넓은 공간을 지닌 레코드샵이었다. 내가 주로 듣는 인디, 얼터너티브 분야의 중고 바이닐은 가장 안쪽 방에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고, 나는 이곳에서만 두어 시간을 보냈다. 마치 숲에서 버섯 채집을 하듯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긴 몰입의 시간 끝에 발굴해낸 것은 토킹 헤즈와 슈가큐브스의 초기 이슈반이었다. 아직 중고 바이닐을 사는 데 있어 경험과 노하우가 많지 않았지만 나름의 선택 기준은 있었다. 첫 번째는 발행한 지 오래된 것일 수록 좋다는 것. 두 번째는 슬리브가 꼭 포함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자켓 상태가 너무 새 것이 아닌 적당히 때가 묻고 헌 것이어야 한다는 것.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세 번째 조건인데. 나는 자켓이 빳빳하고 광이 나는 등 상태가 심하게 좋은 것보다 중고 바이닐 자켓 특유의 뭉툭하고 헌 느낌이 살아있는 것이 좋다. 모서리의 프린트가 벗겨져 군데군데 속살이 하얗게 드러나있는 상태라면 갖고 싶다는 마음에 더욱 크게 사로잡힌다.
고심 끝에 머나 먼 여정의 동반자로 발탁된 이들을 품에 안고 카운터로 다가가니, 유쾌한 성격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이 내가 고른 음반들을 보고 매우 좋은 선택이라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의 옆자리를 넓게 차지하고 있는 아직 제 자리에 가지 못한 음반들을 보니, 모든 손님이 계산을 마치고 나간 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겁게 정리에 몰두할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내가 이곳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미 진지하게 디깅에 몰입하고 있었던 오렌지색 후드의 남자 손님은, 내가 이 거리에서 볼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곳에서 좋은 음반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장 밖에서 큰 창을 통해 보이는 그의 등판은 변함 없이 진중하고, 열의에 넘쳐 보였다. 옆에는 그동안 고른 듯한 바이닐을 듬뿍 쌓아 놓은 채. 이런 곳에서 겨우 두 개만 사고 나온 나는 갈 길이 멀다는 걸 느꼈던 순간. 여행지로써는 꽤나 심심했던 코펜하겐이지만, 사운드 스테이션만큼은 다시 방문하여 손때 묻은 중고 바이닐들을 잔뜩 골라 가방에 넣고, 주인 아저씨의 유쾌한 열정까지 한가득 담아가고 싶은 곳이다.
에든버러의 <언노운 플레져스> 역시 기억에 남는 레코드샵이다. 조이 디비전의 앨범 타이틀을 따온 가게 이름과 검정색 바탕, 초록색 폰트의 군더더기 없는 간판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여행을 준비하며 지도에 미리 표시해놓았던 곳이다. 국제 페스티벌로 인해 북적대는 구시가지에 위치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파가 끊이지 않는 에든버러 성 주변으로부터 꽤 떨어진 한산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반적인 규모의 공간을 지닌 레코드샵이지만, 역시 외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간판 아래로 내 시선을 이끈 것은 에든버러에서 촬영된 영화 <트레인스포팅>과 조이 디비전의 티셔츠.
이곳에선 앙증맞은 7인치의 바이닐을 대량 취급하고 있었다. 가벼운 탐색 도중 발견한 것은 스미스의 87년도 싱글. 나름 근사한 것을 소장할 수 있겠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자켓의 강렬한 흑백 사진 속 남자와 눈을 마주쳤던 오퇴르의 바이닐, 스코틀랜드 출신 인디 뮤지션이라는 Lazy Day의 싱글 바이닐을 골랐다. 기분이 참 좋긴 했나보다. 오퇴르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던 탓에, 일반 싱글이 아니라 어쿠스틱 라이브가 수록된 앨범이라는 사실을 나의 턴테이블 위에 얹은 뒤에야 알아차렸으니. 뭐. 아무렴 어떤가. 콤팩트한 느낌의 7인치 바이닐 역시 12인치 만큼이나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언노운 플레져스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물건을 계산하기 전 주인 아저씨는 아마도 본인만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이 메모된 음반 목록을 체크했고,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무의식적으로 동경이 깃든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무언가가 내 마음에 콩- 하고 작은 보석을 던진 듯한 기분. 재빠르게 동의를 구한 뒤, 내겐 장인과도 다름없는 그 분주하고 섬세한 손을 카메라로 포착했다. 그는 '왜 이런 걸 찍지?'하며 어리둥절해 하는 듯했지만, 내 딴엔 무척 감동적인 장면이었다고요.
헬싱키에서 유일하게 방문했던 레코드샵인 <Levykauppa Keltainen Jäänsärkijä>는 벼룩 시장에 가던 길 우연히 발견했다. 핀란드 현지의 음악 동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는데, 주된 장르는 역시 핀란드의 자부심인 헤비메탈. 그리고 그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이다.
이곳이 특히 좋았던 건 새로운 'suomi'(핀란드인들이 자국을 칭하는 말)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듣기만 해도 참 멀게 느껴지는 핀란드의 레코드샵에 왔는데, 이왕이면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영미권 앨범보단 핀란드 음악가의 앨범을 사는 쪽이 더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아는 피니쉬 아티스트는 기껏해야 French Films, PMMP, TV-resistori 정도였던 내게, 수많은 핀란드 인디 아티스트들의 음악과 조우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이쪽은 메탈이 아니고서야 인터넷을 통해 음악 정보를 찾는 데 한계가 있는 동네이다보니 더욱 그랬다. 핀란드어로 가득한 이곳에서 내가 유일하게 의미를 알고 있는 단어, 'suomi' 태그가 붙어있는 진열대에 온 감각을 쏟아부었다. 이는 오로지 로컬에서만 가능한,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백지 상태의 나를 덮쳐오는 새로운 음악들의 파도. 앨범 커버와 앨범명, 아티스트명의 첫 인상에 의존해 음반을 고르는 일이 참 재미있었다. 나름 중요한 판단 기준도 하나 세웠는데, 바로 곡의 가사와 타이틀 모두 영어가 아닌 핀란드어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 고민 끝에 고른 앨범은 Homevideo의 <Mutta nyt ajattelen hmm hyvä on sitten>. Homevideo라는 아마추어스러운 이름 하며, 편안한 일상의 사진을 조각한 듯한 앨범 아트 하며, 맥 드마르코 풍의 루즈한 기타 사운드가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한국에 돌아가서야 들을 수 있는 이 앨범에 큰 잠재력이 부여된 시점. 새로운 음악을 더욱 새롭게 접하는 방식을 이렇게 터득했다.
Homevideo의 바이닐 외에도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TV-resistori의 중고 CD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다. 소박하지만 적절한 양의 소비. 우연히 들어간 것 치고 참 괜찮은 곳을 찾아냈다는 것에 대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앨범 구입과 별개로 찾아 들어보고 싶은 음악이 많았는데 따로 기록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티스트명이라도 몇개 적어왔어야 했는데 말이다. 부족한 내공이 불러온 나의 실수 때문에, 형광 분홍색으로 산딸기가 그려져 있었던 이름 모를 앨범의 커버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맨체스터의 중심가인 노던 쿼터에는 괜찮은 레코드샵들이 많았다. 새 음반과 음악 관련 상품, 다양한 자체 제작 머천다이즈를 판매하고 있는 <피카딜리 레코즈>, 맨체스터 밴드들의 티셔츠를 구입하기 좋은 <바이닐 리바이벌>, 중고 음반전문 거래소 <바이닐 익스체인지> 등. 중심지로부터 버스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버니지에는 오아시스의 지극한 팬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시프터스 레코즈>가 있다. 'Shakermaker'의 가사에 등장하는 (이제는 유명 인사가 되어버린) 시프터씨가 운영하는 가게다. 앞서 기록한 레코드샵들에 비하면 물건도 많은 편이 아니고 새 상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닌 참 소박한 규모의 동네 음반 가게지만, 나처럼 성지 순례를 위해 멀리서 찾아 온 듯한 손님들과 몇몇 동네 주민들로 향수 어린 활기가 넘치던 곳. 소년 시절의 갤러거 형제가 이곳에서 음반을 샀을 것을 생각하니 괜히 코웃음이 나왔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빛바랜 포스터들이 인상적이었다. 스톤 로지스와 조이 디비전, 해피 먼데이즈, 뉴 오더 그리고 오아시스. 역시 맨체스터의 영웅들이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참 상투적이긴 하지만 오아시스의 CD를 찾아보다가, 결국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해피 먼데이즈와 스톤 로지스의 중고 CD를 골라 들었다. 시프터씨가 말하길, 오아시스는 물건이 들어오는 족족 나간다고.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어린 형제가 고른 앨범을 계산하는 젊은 시절의 시프터씨를 상상하며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니, 필름 카메라에 사진 찍히는 건 오랜만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있어 레코드샵은 삶 그 자체겠지. 갤러거 형제도 결국은 궤적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저 음악이 좋아 시작한 레코드샵을 책임 지고 이끌었을 뿐인 시프터씨의 가게. 그의 삶을 이루는 궤적의 일부.
유럽이 참 좋지만은. 좋았지만은. 이젠 더 욕심이 생겨서, 완전히 새로운 공기로 가득한 도시의 레코드샵에 가보고 싶다. 작년에 여행했을 당시 레코드샵에 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홍콩부터, 아직 여행해보지 않은 타이페이나 방콕 같은 도시들(찾아본 결과 특히 대만에 멋진 가게가 많아서, 여행 갈 계획도 없는데 괜히 지도에 여러 곳을 표시해두었다). 유럽의 레코드샵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 있지 않을까 싶다. 반가운 마음으로 밖에서 지긋이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그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미지의 공간에 몸을 담글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렘으로 차오른다. 그곳에선 어떤 보물을 찾아낼 수 있을까. 나의 평범한 여행에 풍요로움이 더해지는 순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