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체스터부터 리암 갤러거의 LCCC 공연까지
맨체스터. 많은 사람들에게는 축구의 성지로써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도시겠지만, 내게는 영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음악 도시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댄스 음악과 사이키델릭, 록 음악을 결합한 독창적인 사운드로 본토를 뒤흔든 '매드체스터(madchester)'가 발생한 본고장이자 버즈콕스부터 조이 디비전과 더 스미스, 오아시스, 최근엔 The 1975까지, 굵직한 밴드들을 배출해낸 도시이기도 하다. 나는 확실히 미국보단 영국의 음악을 즐겨 들었고, 그 중에서도 맨체스터 출신의 밴드들에 강하게 마음이 이끌렸다. 스미스의 비관적인 낭만에 젖어 몸을 비틀고 싶었고, 스톤 로지스의 데뷔 앨범은 한 여름 밤 알코올 없이도 맨 정신을 취하게 만들었고, 오아시스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 사치일 정도로 음악을 듣기 시작한 때부터 내게 큰 의미를 지닌 밴드 중 하나였다. 이들의 공통된 출신지를 알고 놀란 건 비교적 최근이긴 했지만. 어쨌든, 두 번째 영국 방문에서 맨체스터에 5일을 투자하기로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축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볼 거리가 많은 곳도 아닌데 뭐 그리 오래 있냐는 반응이 종종 돌아왔지만 난 그냥 내가 좋아하는 밴드들의 대다수가 맨체스터 출신이니 '성지 순례를 하러 가는 거다'라고 대응했다. 그렇다. 사실 이유는 별 거 없다. 단지 이 도시에서 강렬한 음악적 태동이 발생할 수 있었던 원인을 (비록 1차원적 사고 방식이긴 하지만) 그 공간에 있음으로써 직접 깨닫고, 발견하고 싶었다. 눅눅한 갈색빛을 띤 이 공업도시가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의 파라다이스로 하얗게 타올랐던 흔적을 따라 걸어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맨체스터는 이러한 나의 궁금증에 충분한 해답을 던져주었다. 물론 확실하진 않지만, 매드체스터 사운드처럼 껄렁껄렁 무심하게,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해답을. 나의 맨체스터 여행은 레코드샵을 둘러보는 것부터 스미스의 <The Queen Is Dead>에 사용된 사진의 배경이 된 'Salford Lads Club', 갤러거 형제가 어린 시절 지내던 동네 버니지 등을 찾아가는 성지 순례 코스로 진행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꽤나 미적지근하게 흘러가는 여행에, 음악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진심으로 갈망하고 있었다. 무려 5일을 계획한 것에 후회까지 들려던 순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맥주나 마시려고 들어간 라이브 바에서 마침내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을 만날 수 있었다. 관광객 하나 없어보이는 이곳에서 아마추어 밴드의 사운드가 바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밴드는 제임스와 오아시스의 곡을 흥겹게 연주하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자연스럽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일상적이며 인상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성기를 구가한 지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지난 밴드의 음악이, 시대와 상관 없이 이들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것일까. 고대하던 이 기쁨에 겨운 광경을 감상하는 데 흠뻑 빠져 있다가 맥주를 한 잔 더 시켰고, 시민들의 노래에 합세했다. "Oh, sit down, oh, sit down, oh, sit down, sit down next to me!"
전날 밤 라이브 바가 남긴 여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아침까지도 그 맹렬한 기운 속에서 정신을 헤매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의 뇌리를 스친 것은, 리암 갤러거의 맨체스터 공연이 바로 이 날 열린다는 사실이었다. 여행을 계획한 시기부터 알고 있었지만 딱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던 그 공연. 그러나 이미 한 발 아니 세 발은 늦은 시점이었고, 표를 구하려니 몇 달 전부터 매진 상태에 머물러 있는 모양이었다. 좌절할 틈도 없이 무언가에 홀린 듯 중고 티켓 사이트에 들어갔다. 중고 표마저 눈 앞에서 빠르게 팔려 나가는 상황. 다급한 마음에 결국 원가의 두 배에 달하는 값을 지불하고 스탠딩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일사천리 호스텔 리셉션에 티켓의 인쇄를 부탁하였고, 이성이 돌아온 건 'enjoy!'라는 말과 함께 인쇄된 티켓을 건네받은 뒤였다. 표가 사기이면 어쩌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그때서야 몰려왔다. 표를 구매한 사이트에 대해 알아보니 역시나 여느 중고 거래 사이트가 그렇듯 사기일 확률은 복불복이란다. 마음을 비우며 트램 역으로 걸음했고, 역에서는 리암의 공연으로 인해 교통이 번잡하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시민들로 붐비는 전차에 몸을 우겨넣고서는 올드 트래포드로 이동했다. 다행히도 나의 표는 유효했다. 잔뜩 긴장한 상태였지만 어찌 됐든 공연장 입성에 성공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노년층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광활한 관객석이 모든 세대를 아울러 조화롭게 물들었다는 점이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세대 간 거의 단절되다 시피한 우리나라에선 분명 보기 드문 광경이었던 것이다. 굵직한 담배 연기가 쉴 새 없이 시야를 메우고 시큼한 맥주 향이 만개하던 공연장. 낯선 공연 문화에 처음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현장감에 몸을 맡기고 주위를 둘러 보니 그 누구도 불만은 없어 보였고, 인파가 이루어내는 자유분방한 열기에 나 역시 공연에 대한 설렘으로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는 자신의 동경하는 록 스타처럼 팔자 걸음을 걸으며 거침 없는 맨체스터 사투리로 기대감을 쏟아냈고, 아버지와 함께 온 누군가는 <잉글랜드 이즈 마인>에서의 모리시처럼 감상에 잠긴 채 조용히 무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 또는 형제 자매의 손을 잡고 온 꼬꼬마들은 그저 신이 나 보였다. 각자의 방식대로 도시의 영웅을 고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펼쳐진 진풍경에 다름 없었다.
2018년 8월에 열린 올드 트래포드 랭커셔 크리켓 구장 공연(줄여서 'LCCC')은 무려 5만 명 관객의 규모로써 영국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대형 야외 공연이다. 저조한 인기로 아레나 규모의 공연을 할 수 없었던 리암의 비디 아이 시절을 되짚어 보면, 이번 공연은 솔로임에도 불구하고 대형 구장을 채웠다는 점에 있어 상당히 기념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는 솔로 앨범 <As You Were>의 성공과, 리암 갤러거가 음악가로서 건재하다는 사실을 뚜렷히 증명하기도 한다. 또한 리암이 주인공이긴 하나, 또 다른 맨체스터 출신의 아티스트 Twisted Wheel과 Bugzy Malone, 그리고 5월부터 리암의 서포트에 나선 리처드 애쉬크로프트의 무대를 볼 수 있다는 점 역시 관객을 이끈 이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명해야하는 부분은 런던도 글래스고도 아닌, 리암의 고향인 맨체스터에서 개최되는 공연이라는 점이다. 특히 멀리서 발걸음한 나같은 팬으로선 90년대,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이 도시의 음악적 연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에 더욱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까랑까랑한 보컬과 찰랑대는 기타로 아름다운 브릿팝의 부흥기를 떠올리게 한 Twisted Wheel, 리암 갤러거 공연의 게스트로서는 다소 파격적이었던 힙합 무대를 보여준 Bugzy Malone의 무대가 연이어 진행되었다. 저녁의 냄새가 스쳐오는 선선한 바람, 점점 저물어가는 해는 메인 스테이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쌀쌀해지는 날씨와 반대로 고조되는 열기에 담배와 맥주 향이 더욱 짙어져 갔고, 공연장으로 입장하는 관객들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길고도 짧은 약 40분의 브레이크 타임 끝에 빨간 재킷을 입은 리처드 애쉬크로프트가 무대에 올랐다. 가벼운 감상으로만 그쳤던 앞 차례의 두 공연과 달리 관객석에서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환호성이 터졌다. 리암도 리처드도 밴드가 아닌 솔로로서 본인의 이름을 걸고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지금, 나에겐 사실 리처드의 존재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선글라스 뒤에 숨겨진 날선 눈빛을 상상하며, 세월조차 결코 깎아내지 못할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 당하는 걸 느꼈다. 'This Is How It Feels', 'Hold On'과 같은 솔로 곡들과의 완급을 이루며 상승 곡선을 오르는 지점은 역시 찬란한 버브 시절의 곡들. <Urban Hymns>의 비통하고 아름다운 사운드는 축축한 비를 쏟아내듯 거대한 공연장을 광활한 감동으로 물들였다. 연주의 중심부를 예민하고 거칠게 가로지르는 리처드의 목소리가 나의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와 깊은 곳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그와 함께, 사람들과 함께 'Sonnet'을 울부짖었고, 두 팔을 벌려 'Lucky Man'의 허심탄회한 자유를 끌어 안았다. 마침표를 알리는 'Bitter Sweet Symphony'는 과연 명불허전.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따위는 없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리. 재킷을 벗어 던진 그의 마른 몸에서 뻗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 시대의 '송가'를 일제히 따라 불렀고, 나 역시 그랬다. 그래야만 했다. 지금껏 수많은 밴드의 공연을 봐 왔지만, 록 스타란 바로 이런 것일까.. 무대 위에서의 작은 손짓과 몸짓, 툭툭 내뱉는 말과 의기양양한 말투, 그저 존재만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고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하는 힘. 그 매혹적이고 강렬한 에너지가 저 멀리 무대에 서있는 그로부터 일직선의 형태로 선명하게 전해져왔다. 이 감동이라면, 리암의 공연을 보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리처드의 무대가 더 이어졌다면 내 안에서 뜨겁게 팽창하던 무언가가 감동의 압력을 버텨내지 못하고 정말, 펑- 하고 터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Bitter Sweet Symphony'로 끝난 것이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암 보다도 리처드의 공연이 나에겐 베스트였다. 서포트라면서 이렇게 메인 앞에서 엄청난 것을 보여줘버리면 어떡하란 걸까. (정작 그는 별다른 장치도 없는 소탈한 무대에서 노래한 것이 전부였지만.)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공연장엔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긴장과 설렘이 바쁘게 교차되던 시간. 주인공의 존재감을 예고하듯 스피커에서 스톤 로지스의 'I Am The Resurrection'이 흘러나왔고, 조명과 스크린이 더욱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곧 이어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를 점령하는 맨시티의 응원가! 모두가 기다려온 록 스타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Rock 'n' Roll Star'로 호기롭게 시작한 셋리스트의 대부분은 오아시스의 곡들로 채워졌다. 뭉클하리 만큼 순수했던 'Listen Up'에 이어 투어 첫 라이브인 'Champagne Supernova'의 피아노 반주가 흘러나올 땐, 대양 너머의 하늘에서 발하는 녹색 광선을 바라보는 것처럼 묘한 황홀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황홀한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광경이었다. 춤추는 할머니와 부동자세로 고개만 흔드는 할아버지, 십대처럼 꺄르르 웃고 있는 중년과 반대로 진지하게 음악을 감상하는 아이들,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는 소녀와 소년들, (유튜브에서나 보던) 남성의 어깨에 올라타 두 팔을 벌리고 공연을 즐기는 여성들, 모두가 어우러져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의 주인공들도 티셔츠를 맞춰 입고 어디엔가 모여 청춘을 만끽하고 있을 것 같았다. 뮤지션의 기분을 좋게 하겠다고 가사를 인위적으로 외워가며 하는 '떼창'과는 다른, 자연스럽게 모아진 수만 명의 목소리가 넓은 구장에 울려 퍼졌다. <As You Were>의 수록곡 역시 오아시스의 곡만큼은 아니었지만, 무대 위 록 스타에 대한 이들의 녹슬지 않는 애정을 증명하듯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록킹함과 서정성을 오가며 끝없이 박차를 가하는 공연. 그저 놀랍고, 감동적일 따름이었다.
아쉽지만 안전하게 숙소로 돌아가야 했기에 내 인생의 트랙 'Supersonic'을 마지막으로 공연장을 떠나야 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던 건지 나름 담담했던 내 마음은, 트램 역으로 가는 길 오히려 더 풍부하게 들려오는 리암과 사람들의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은 낙관으로 가득 차올랐다. 마지막 곡인 'Live Forever'까지 얼떨결에 듣게 되었고, 내 감정 회로는 굉장한 경험을 한 것 같다는 행복감과 뿌듯함, 그리고 이 도시의 시민들에 대한 부러움으로 뒤죽박죽 얽히고 있었다.
맨체스터에서 음악이, 그리고 밴드가, 이들의 연대감이 갖는 의미를 고작 5일 지냈던 내가 뭘 알 수 있었겠냐만은, 그래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축구의 도시라는 것 역시 인정하겠다. 하지만, 즐거움을 추구하는 음악가와 이에 매료된 사람들로 가득한 이 도시의 더 깊숙한 곳에는 역동적인 리듬, 명쾌한 선율, 자유로운 쾌락으로 넘실대는 에너지가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한국에서 오는 여행객(물론 애초에 관광도시와는 거리가 멀기에 맨체스터를 찾는 여행객은 드물지만)들을 비롯,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덕후로서의 바람이 있다. 이 도시의 태도는, 비단 8,90년대의 전성기를 그리며 동어반복하는 향수에 머물지 않았다. 내가 본 맨체스터는 여전히 꿈틀대는 음악적 원천 위로 꺼지지 않는 빛을 발산하며 물결치고 있는 쿨한 도시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