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록 팬덤 문화, 이제는 변화해야 할 때
록 팬덤 문화는 분명 남성중심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10년이 넘게 록 음악을 들어온 나조차 ‘록 좀 잘 안다’고 어깨를 으쓱하던 남성들로부터 무시당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감내해야만 했다. ‘여자가 록을 좋아해?’와 같은 말은 이제 양반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라디오헤드에 대해서는 ‘Creep’을 비롯한 몇 대중적인 곡만 알고 있을 것이며, 블러는 잘생겨서 좋아할 것이라고 당연하게 가정하는 그들의 위세를 견디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대부분의 여성 록 팬 역시 나와 유사한 경험을 겪어왔을 것이다.
한국의 해외 음악 판도는 아직 7-80년대에 머물러있는 것 같다. 팝 기획 프로만 편성되면 출연하는 유명 평론가와 그가 창립한 음악 평론 웹진. 허울은 좋지만,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지식이 풍부하고 필력이 출중하다 할지라도, 감성과 사고 방식이 레너드 스키너드 시절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을 더 이상 찾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몇몇 음악 커뮤니티 회원들이 떠오른다. 한때 열심히 들락날락 했지만 지금은 유령 회원으로 있는 락 관련 다음 카페가 ‘고인 물’의 결과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언변만으로는 평론가가 따로 없지만 시류조차 못 읽는 깨시민들로 가득하다. 음악적 취향으로 조금 남달라 보이고 싶어하지만, 흔히 비난 받는 커뮤니티의 전형에서 그닥 벗어나있지 않다는 걸 그들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피XX크의 평은 이렇더군요. 음악적 완성도가 높더군요. 이 밴드는 한물 갔죠. 그 퀘퀘한 토론의 장이 촌스럽게 보이기 시작한 순간, 그곳에 몸을 담아 그들과 함께 고여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취향의 공유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의 활동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세계의 락 페스티벌을 모두 돌겠다는 야망도, 좋아하는 분야에 반드시 종사하겠다는 꿈도 없는 그저 음악 듣기를 좋아하는 팬 한 명이다. 한국의 음악 시장, 특히 해외 음악에 있어선 더욱 정체된 시장 구조에 불만은 늘 갖고 있었지만 많은 걸 바라지 않고 나름대로 만족하며 잘 살아오기도 했다. 가끔씩 내한 공연을 보러 가고, 좋아하는 아티스트 보러 비행기에 오르기도 하고, 여행 가방에 음반 한 가득 채워오면 더 기분 좋은 게 아니냐며 위안해왔다. 그러나 나 스스로가 사유의 변화를 거듭할수록 불편함의 크기는 빠르게 부풀어올랐다. 불편함을 넘어서 이상함, 고리타분함과 같은 부정적인 감상으로 머릿속이 포화되기에 이르렀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 것들에 대해 그저 방관하고 넘어가기엔 내면의 거부 반응이 너무 거세져 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멀리하게 된 카페 회원들처럼 정체되어 있고 싶지 않고, 머리와 마음은 정체돼 있으면서 몸(혹은 손가락)만 앞서 나가는 그들의 촌스러움을 닮고 싶지도 않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의 범위가 점점 좁아짐을 느끼며 많이 괴롭고 외로울 때도 많다. 한편으론 나 자신이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소신껏 나아갈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이 있다면 이것이려니 한다. 당장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단순히 생각할 뿐이다. 검정치마의 신보를 접했을 때도, 최근 노엘의 ‘큰형님’ 인터뷰로 논란이 일었을 때도 이곳저곳의 댓글 창을 읽으며 짜증이 솟구쳤다. 논란이야 둘째 치고 몇몇 사람들의 태도에 더 진저리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맘 편히 즐길 수 있던 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린 건가 싶어 씁쓸함이 들기도 했다.
그동안 남성의 이미지로 대변되어 왔으며 여성의 존재는 자연히 묻혀졌던 록 팬덤 문화에서 노엘은 처음으로 한국 여성 팬들을 알아봐 주었다. 자신을 보러 온 ‘10대 소녀들(비록 사실과는 다를지언정)’로 북적이는 콘서트장의 광경에 그저 신기하고 흐뭇한 마음에서 내던진 말이겠지만, 난 괜스레 감동을 받았었다. 한 눈에 보일 정도로 가시적인 존재로서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그럼에도 논란을 부른 이번 인터뷰에서는 한국에서 노엘을 부르는 애칭을 ‘큰형님’이라 알려주었고, 노엘에 의해 그나마 끌어올려진 여성 팬의 존재는 이렇게 또 다시 흐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뷰어의 요청에 ‘큰형님’을 한국어로 따라하는 노엘을 보며 여성 팬으로서의 나는 서운함을 느꼈던 것일 테다. 반갑게도 나와 같은 심정을 느낀 많은 여성 팬들이 속상한 마음을 토로했다. 논의는 더욱 불거져서, 록 팬덤의 남성중심적 문화를 꼬집는 의견들도 올라왔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던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에 기뻤지만, 역시 반대 입장의 일부 남성 팬들은 조심스럽게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 팬들을 비난하고 조롱했다. 왜 여성팬들이 불편함을 느꼈는 지에 대해 들어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이제야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소수자들을 향해 ‘꼴페미’라는 낙인을 찍기 급급했다. 다행히도 여성의 머릿수가 많았던 덕에 갈수록 감정싸움으로 번져가던 분위기는 자정 되었지만, 그나마 대화다운 대화가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커뮤니티에서 조차 일부 남성 팬들이 솔직하게 드러낸 저열한 태도에 큰 실망감이 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락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당시, 모두가 페미니즘을 멸시하는 감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외로이 내 의견을 개진하던 상황이 떠올라 울컥했던 것도 같다.
세상이 변화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느낄 불편함과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영역이든 우리는 시류에 맞춰 기존의 분위기를 검토하고 수정해 나갈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논의를 수용하지 않고, 이해는 안 되고 자기 일도 아니니 꼴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논의를 부정하고,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도태될 것이고, 고이고 고여 썩어 갈 뿐이다. 사실, 이번 일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0년 넘게 몸을 담아 왔음에도 소수자로서의 불편함을 감춰 두어야 만 했던 록 팬덤 문화에서, 드디어 젠더 논의가 점화되었으니 말이다. 사소한 것에 느낀 큰 불편함과 문제 의식을 삭히지 않고, 건강한 비판을 시작한 여성들에 존경의 마음과 연대의 의지를 전하고 싶다. 나처럼 10년째 록을 좋아하고 있다는 한 회원 분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해온 노엘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록은 해방이고 결국은 사랑이니까요(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