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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은 Jan 01. 2023

어쩌다 뉴욕

뉴욕, 뉴욕, 뉴욕     

결혼 전 남편은 시부모님과 함께 미국에 다녀왔다. 여행을 마치고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그려진 엽서를 내밀었다. 이렇게 적혀있었다.    

 

다음에 내가 뉴욕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너와 함께일거야.      


약 4년이 지나 그때의 다짐은 현실이 됐다. 우리 사이의 아기가 태어난지 

백일을 조금 넘겼을 때 남편이 물었다. 회사에서 파견을 나갈 기회가 있는데 지원해도 될까? 나는 물었다. 어디로 가야하는데? 남편은 대답했다. 뉴욕.     


뉴욕.      


그 두 음절에 잠시 가슴이 울렁했다. 고층 빌딩숲 사이로 세련된 뉴요커들이 빠르게 걸어 다니는 그 도시? 확실히 뉴욕은 힘이 있다. 도시의 이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하니까.      

하지만 아기는 너무 어렸다. 나도 특별히 해외 생활을 하고 싶은 의지도 욕망도 없었다. 휴직도 연장해야 했다. 그렇다고 떨어져 지낼 수는 없는 일. 결국 남편의 꿈을 지지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우리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전 직장이 상암동으로 이사가기 전까지 삶의 반경은 대중교통으로 30분 이내였는데 세종, 동탄 등으로 점점 멀어지더니 심지어 뉴욕이다. 첫 뉴욕의 감상은 무척 춥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겨울도 매섭다 했는데 북극 한파의 기세가 몰아친 뉴욕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특히 도심은 고층 빌딩 사이로 불어닥치는 빌딩풍과 허드슨강의 강바람으로 바람이 차고 매서웠다. 그럼에도 반팔, 반바지 차림인 사람들을 간혹 볼 수 있었는데 어떤 영문인지 알 수 없다.     


며칠간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외출할 일이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에 누워있고 싶었지만, 마트 장보기며 집 구하기 등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으니까. 아기와 함께 외출할 때마다 유모차에 두툼한 방풍 커버를 씌워 다녔는데 맨하탄 거리의 어린 아이들은 담요를 쓰거나 그마저도 없었다. 이 얘기를 했더니 친구가 농담 반 섞어 방풍 커버를 팔아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잠시 동요했지만 이것저것 알아보다 여의치 않은 일이라 금새 접었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고, 무엇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불안감은 머나먼 미국 땅까지 와서 나를 괴롭혔다.      


아이를 키우는 것, 당장 미국에서 지낼 집을 구하는 것, 잠시나마 이 사회에서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 할 일은 태산처럼 많았는데도 나는 버릇처럼 불안하고 조바심이 났다.      

20대 때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갔던 친구들은 한국에 돌아와 한참이나 이국을 그리워하곤 했다. 여유로운 분위기, 낯선 환경이 주는 두근거림 등을. 늘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에서 벗어나 지냈던 시간이 참 좋았노라고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당시의 나는 ‘여유로운 마음’을 상상으로 그려보곤 했는데 와 닿지는 않았다.      

10년이 훌쩍 넘어서도 나의 본질은 비슷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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