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 보수 정치인을 응원했다. 김종인 위원장이 보수정당을 도왔다는 점도 이유였지만, 진보 쪽에 응원하고 싶은 정치인이 없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지금도 자칭 진보 대통령들보다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대통령을 자주 참고한다. 유시민 장관의 비유를 빌리자면, 맞춤복 같은 사회주의 정치인이 없어서 기성복 중에서 그나마 깔끔한 쪽을 골랐다. 다른 쪽 옷은 기괴해 보일 정도로 화려하거나 반사회적인 히피 같았다.
마르크스가 활약하기 전까지, 사회주의자는 계급, 젠더, 정당을 초월해서 상황에 맞게 움직였다. 생시몽의 제자들은 급성장하는 노동운동과 연대하면서도 나폴레옹 3세와 협력했고, 페이비언 협회 회원들은 노동당 뿐만 아니라 자유당과 보수당에도 사회주의를 퍼뜨렸다. 굳이 비유하자면, 과거 사회주의자들은 무력으로 깨우치게 하는 소련 공산당보다는 실천으로 보여주는 국경 없는 의사회와 닮았다.
원래 사회주의는 산업화가 초래한 사회문제에 집단적이고 과학적으로 대응해서 사회를 다시 결속시키려는 모든 노력을 가리켰다. 생시몽의 제자와 로버트 오언이 사회주의라는 말을 유행시킨 이래로, 사회주의를 선택 가능한 대안 또는 방침으로 여기는 사람이 늘어났다. 과학적 방법을 활용한 사회문제 공동대응과 사회 재통합, 당시 산업화의 그림자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런 목표에 공감했다. 귀족이던 서민이던, 남자던 여자던, 보수당원이던 노동당원이던 상관 없었다.
선배들을 따라서, 나도 더 절실한 사회문제에 개입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데에 기여할 정치인을 응원했다. 더 많은 재분배, 더 큰 정부 개입을 바란다는 점에서 좌파에 속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좌파 정치인은 집권할 가능성도 없고, 문제를 잘 해결할 능력도 없어 보였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어도, 적절한 권력과 계획이 없다면 아무 의미 없다. 이 없으면 잇몸이니, 집권 가능한 정치인들 사이에서 그나마 나은 쪽에 기대를 거는 게 합리적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수 정치인을 지켜봤다.
지금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유능한 보수 정치인은 권력의 중심에 없고, 권력의 중심에 있는 보수 정치인은 파산한 뉴라이트 사상, 한국식 대처리즘을 회생시키려 한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까지만 해도, 보수는 겉으로라도 실용과 노동을 앞세웠다. 그덕에 가난한 사람도 보수를 응원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적을 절멸시키기만 하면 나머지가 알아서 해결된다는 듯이 행동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더 키우고 있다. 내년 총선 공약집은 읽을 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