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친미'하는 그럴 듯한 이유.
반미주의는 어딘가 이상합니다.
조선은 처음부터 명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겼다. 다소 부조리한 일이 있어도 되도록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명나라는 아직 정체성이 불분명했던 신생국 조선을 심각하게 의심했다. 명나라는 말, 매, 여자, 음식 등 온갖 것을 조공으로 요구하며 충성도 테스트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시간이 흐르면서 누그러진다. 명나라는 천명을 받드는 제국, 하늘 아래 첫째 역할을 맡고 있었고, 조선은 그런 명나라의 제후국이었지만, 둘의 관계는 생각보다 종속적이지는 않았다.
최근 역사학자들은 종속의 대명사로 통하는 '조공'이 마냥 종속적인 일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까다로운 격식을 요구했지만, 결국 제후국이 이득을 보는 무역과 같았다는 의미다. 그 외에도, 명나라는 천하에 유일무이한 황제국이었지만, 조선이 '태정태세문단세' 등 황제와 어울리는 묘호를 써도 간섭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 아니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랐던 탓인지, 아테네는 명나라처럼 관대하지 않았다. 아테네는 민주주의에서 우러나오는 결속력과 경제력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을 받아쳤다. 그 뒤로 주변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을 통합하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었는데, 문제는 아테네가 도시국가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아테네는 공동안보를 명분으로 동맹 도시들을 착취했다. 동맹 도시들은 델로스 동맹에 주기적으로 보호비를 상납했지만, 그 보호비를 통제할 힘은 오롯이 아테네에만 있었다. 게다가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에 거스르는 도시에 무력 제재도 가했다. 사실상, 명나라 같은 천하의 관리자가 아니라 건달이었던 셈이다. 델로스 동맹에 가맹한 도시는 그야말로 속국이었다.
흔히 반미주의자는 한미동맹을 델로스 동맹처럼 본다. 언뜻보면 미국이 무분별하게 달러를 풀어서 주변국의 경제력을 착취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병력까지 차출해 가니까, 미국 중심 세계는 델로스 동맹이나 다름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외교, 안보, 경제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영향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미동맹은 델로스 동맹과 다르다. 델로스 동맹이 종속적인 이유는 오직 아테네의 이익만을 위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엄연히 중화질서 전반을 관통하는 법과 가치를 지키는 입장이었지만, 아테네는 명백히 사적인 이익을 위해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는 폭군이었다. 부모가 모든 것을 쥐고 있더라도 자녀의 영역과 이익을 생각한다면 그 부모 자식 관계를 종속적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강자가 남들을 압도하더라도 공동가치를 따른다면 그 강자와의 관계는 종속적이지 않을 수 있다. 동로마와 송나라 황제가 공화주의적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미국은 국제법과 여러 이민자들의 감정, 인도나 사우디처럼 중립적인 나라들의 변화에 신경써야 한다. 공동 가치를 따르는 동시에 다양한 세력으로부터 견제받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아테네보다 명나라에 가깝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은 명나라보다 훨씬 괜찮은 국제질서 관리자다. 그렇다면, 우리가 완벽히 자주권을 행사하기 어렵다고 해도, 미국과의 관계를 델로스 동맹처럼 볼 수는 없다.
물론 우리나라도 언젠가 전시작전권을 돌려받아야 하고, 미국의 배신에 대비해야 한다. 그런데, 반미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지금 당장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천하 질서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더 많은 자주권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
미국으로부터 멀어지면. 우리나라는 아테네보다 이기적인 중국에 종속될 수 있다. 중국이 홍콩과 대만, 그리고 일대일로에 참여한 군소 국가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보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중국의 거창한 꿈은 새로운 델로스 동맹을 만드는 것이지, 과거의 중화질서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미국식 중화질서에서 벗어나서 중국식 델로스 동맹에 흡수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미국 주도 국제질서의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반미주의자는 다른 의도를 갖고 미국을 공격한다는 의심을 영영 피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