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혼잣말
사장이 시키는 대로 빵 담는 트레이를 닦고 있었는데 잔소리를 들었다.
"여기 쟁반 닦으러 온 것 아니잖아. 들어온지 며칠 된 것 같은데 그것만 하고 있으면 어떻해."
내가 다니던 파리바게트 매장은 사장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평소에는 부인 사장이 매장을 관리하다가, 부인이 바쁘면 종종 남편 사장이 매장에 들렀다. 한동안 트레이부터 닦으라고 시킨 것은 부인 쪽이었고, 며칠 째 트레이만 닦는다고 잔소리한 것은 남편 쪽이었다.
나는 일단 사과했다. 열심히 배우겠다는 빈말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럴 때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고 발음이 뭉개졌다. 남편 사장은 다 들리게 한숨을 쉬었다.
이후에도 남편 사장에게 밉보이는 일이 많았다. 남편 사장은 항상 나직하고 짧게 말했다. 나는 남편 사장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평범한 높이로 하는 말도 잘 들리지 않을 때가 있는데, 낮은 목소리는 더 심했다. 나는 "예?"를 반복했고, 사장은 화를 참고 있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다른 직원들도 남편 사장의 말을 종종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다들 오래 알고 지낸 탓에 눈치껏 이해하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었다. 들어온지 얼마 안 된 나는 요령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스트레스가 심할 때 머리가 제 기능을 못한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여러 사건이 겹친 뒤로 인지 능력이 망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남편 사장이 내 개인 사정 따위 알고 있을 리 없었고, 나는 남편 사장에게 관대하게 이해해 달라고 요구할 근거도 용기도 없었다.
따로 짖는 케르베로스
시간이 지나도, 나는 매장 사람들과 손발이 맞지 않았다.
파리바게트에서 파는 샌드위치 중에는 매장 직원이 소스를 뿌리고 포장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고참 아주머니는 케첩과 마요네즈(다른 하얀 소스였을 수도 있다)를 엑스 자로 교차해서 뿌리라고 했다. 그런데 가끔 불쑥 찾아오는 남편 사장은 두 소스를 대각선으로 평행하게 뿌리라고 시켰다.
한 번은 남편 사장이 매장에 없는 날에 남편 사장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고참 아주머니가 역정을 냈다. 대체 몇 번을 가르쳐야 하냐며 얼굴이 벌게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고 맞섰지만 그래봐야 내 손해였다. 나중에는 남편 사장도 본인이 그렇게 시킨 것을 잊은 듯했다.
학교 밖 사회생활이 처음이었던 나는 한 번 씩 지시가 엇갈릴 때마다 답답할 뿐이었다. 매장에 부인 사장과 있을 때는 그 쪽에 맞추고, 남편 사장과 있을 때는 그 쪽에 맞추고, 고참 아주머니와 있을 때는 또 그 쪽에 맞추라니, 이 작은 매장에서 무슨 짓인가 싶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눈치가 없다고 짜증을 냈다. 눈치껏, 알아서, 상황에 맞게 하라는 이야기였다. 눈치 없는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수 있지만, 처음부터 규격을 통일해서 일한다는 선택지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거리다가 '퇴사' 두 글자가 이마 위에 아른 거렸지만, 나는 애써 케첩을 뿌리는 데 집중했다.
집안 개인회생이 끝날 때까지 4년 6개월이 남았다.
눈치 보이는 생존 투쟁
돌이켜 보면, 나는 사장 부부와 고참 아주머니에게 미움받을 만했다. 큰 사고를 친 적은 없다. 제빵 기계를 망가뜨리거나, 영업 정지를 초래하거나, 손님에게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런데 케이크 이름을 자주 틀렸고, 도넛을 예쁘게 튀기지 못했고, 카푸치노에 들어가는 우유 거품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사장이 시범을 보여줘도 나는 원리를 몰라서 잘 따라하지 못했다.
최저시급이 5000원도 안 될 시기였지만, 관리자 입장에서 나는 그 정도도 주기 아까운 직원이었을 것이다. 내가 사장이었어도 나 같은 직원을 보면 답답했을 것 같다. 만약 사장이 '내가 너를 왜 데리고 있어야 하냐'고 물으면,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폐를 끼치느니 차라리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돈을 벌어야 했고, 다른 곳이라고 해서 분위기가 얼마나 다를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손이 느려서 잔소리를 듣더라도 매장에서 버텨야 했다.
그래도 자격지심은 어쩔 수 없었다. 누구는 인맥으로 학력도 위조하고 대기업에도 들어가는데, 지인 부탁 뒤에 숨어서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붙잡고 있는 것이 대수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찜찜함을 덜어보려 했지만, 고작 생각 하나 바꾼다고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훗날 다이소 부천역점에서 오래 일해달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나는 내 무능함에 대해 곱씹었다.
완벽하지 않은 신념
세상 모두가 우수하지는 않다. 누군가는 날 때부터 능력이 부족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환경이 나빠서 능력을 기르지 못했을 수 있다. 문제는 사회가 우수하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생존하고 발전할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 때 무능했던 사람도 적절한 조건에서는 유능해질 수 있으니, 사회는 더 많은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 또한 사회가 극한 상황에 내몰린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내쳐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살 권리가 있고, 인간의 한계가 허락하는 한, 사회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의 생존권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내 도덕적 신념이다.
그런데 '그 신념이 왜 옳은가?'하고 물으면 논리적으로 깔끔하게 답할 수 없다. 오랜 시간 고민해 봤지만, 철학자가 되지 못한 나는 내 신념을 논리적으로 완벽히 증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랜시간 공부한 철학자들도 하나의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학계 밖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세상에는 수 많은 도덕 주장들이 있지만 그 사이에서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은 어느 누구도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강한 생각이 살아남는다
사실 도덕 논쟁은 처음부터 논리적으로 끝맺을 수 없는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논리적으로 옳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내 결론에 타당한 전제가 있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주장에 적절한 근거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주장을 논리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주장의 근거가 적절한지 판단하려면 그 근거의 근거가 무엇인지 따져야 한다. 근거 없는 근거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거의 근거가 적절한지 따지려면 역시나 근거의 근거의 근거가 무엇인지 또 따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따져묻다 보면 더이상 근거를 댈 수 없는 무언가에 다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영국 수학자 유지니아 챙은 논리의 출발선에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이 논리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이 과학 역시 엄밀히 말하면 진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과학도 결국 증명할 수 없는 근거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압이 1일 때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이것이 과학적인 상식이다. 그 근거는 관찰이다. 지금까지 기압이 1인 곳에서는 언제나 물이 100도에서 끓었기 때문에, 이 관찰을 근거로 앞으로도 계속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은 지금까지 관찰한 것이 앞으로도 계속 관찰될 것이라는 믿음을 근거로 삼고 있다. 문제는 이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당장 내일 물리법칙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전제할 뿐이다. 그래서 몇몇 과학자들은 과학이 언제나 더 나은 가설을 찾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논리적인 근거를 댈 수 없으면 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논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논리적으로 따질 수 없는 믿음을 출발선으로 둬야 비로소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논리적인 근거가 없는 생각을 모조리 거부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논리적인 생각 자체가 불가능해 진다.
내 도덕적 신념은 진리가 아니다. 내 신념에 반대되는 신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앞으로도 우리는 논리의 힘으로 도덕적 진리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은 판단 잣대는 무엇일까. 여기서 실력 경쟁을 도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신념이 더 오래, 더 멀리 퍼지는지를 두고 겨루는 것이다. 수 많은 미신과 원시 종교가 잊혀진 것처럼,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없는 신념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결국 더 많은 신자를 더 강하게 만드는 신념이 살아남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는 '협력'이다. 저서 '블루프린트'에서, 미국 사회학자 니컬러스 크리스타키스는 우리 유전자에 서로를 위해 협력하는 전략이 담겨 있다고 강조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과 이익을 주고받고 싶어한다. 물론 서로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이것이 우리가 보는 현실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안에 잠재된 협력 정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든, 협력이 옳다는 신념은 다른 신념들로부터 추종자를 흡수하며 살아남을 것이다. 사람은 협력의 힘으로 큰 문명을 일궜고, 협력의 힘으로 지구를 정복했다. 이는 수 많은 학자들이 공통으로 지목하는, 인간 승리의 비결이다. 그래서 나는 협력의 승리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