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한 진보주의 5화
게다가 정서적 공감 역시 모든 도덕적 주장이 갖고 있는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자. 기차가 교차로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런데 철로 한 쪽에는 흔한 직장인 5명이 묶여 있다. 이 5명이 죽으면 그 가족은 살기 어려워진다. 다른 철로에는 최고의 과학자가 묶여 있다. 이 과학자를 잃으면 신종 바이러스의 백신을 완성할 수 없어서 수백, 수천 명이 죽을 수 있다. 기차는 스스로 멈추기에 너무 늦었고, 선로전환기는 5명이 묶인 쪽으로 설정되어 있다. 전환기 설정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다. 나는 어느 쪽으로 기차가 지나가게 해야 할까.
이것은 트롤리 딜레마를 마음대로 변형한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변형이 있지만 여러 트롤리 딜레마들이 드러내는 진실은 하나다. 도덕 문제에서 하나의 답을 찾기란 매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단순하고 명쾌한 것을 좋아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아무리 머리를 써도 하나의 답을 찾지 못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은 모순이나 오류 없이 생각할 수 없고, 도덕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살인은 왜 나쁠까. 지나가는 여고생을 무차별 폭행한 사람을 왜 처벌해야 할까. '사회가 정글이 될 수 있어서', '피해자가 불쌍해서' 등 여러 근거를 제시할 수 있겠지만, 그 근거의 근거를 계속 따져 묻다보면 누구나 더 이상 근거를 제시할 수 없어서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오랜시간 공부한 윤리학자라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제를 '무한퇴행'이라고 부른다. 무한퇴행은 인간의 추론능력이 가진 한계 탓에 일어난다. 사람은 누구나 더 이상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직관이나 믿음 위에 여러 전제를 쌓으며 결론을 도출한다. 그런 전제가 없다면 논리적인 추론 자체가 불가능해 진다. 모든 추론은 어떤 전제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전제의 전제를 끝없이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리는 어딘가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 출발점은 우리가 정당화 없이 가정한 어떤 진리가 되어야 한다. 이를 공리라고 하며, 이것이 논리의 한계 중 하나다."
by 유지니아 쳉, 논리의 기술, 김성훈 역, 열린책들, 2020.
살인이 나쁘다는 결론도 마찬가지다. 논리적 사고방식으로는 살인이 나쁘다는 주장이 왜 옳은지 완벽하게 증명할 수 없다. 다만 대다수 사람이 살인을 보며 어떤 불쾌함을 느끼기 때문에, 또는 살인이 옳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흔히 살인은 범죄로 통한다.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비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쪽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다. 맨몸으로 쓰나미를 거스르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왜'라고 물으면 결국 모든 주장이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완벽하지 않더라도 의문과 증명은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이 때 많은 사람이 정서적 공감을 멈춤 지점으로 삼지만, 왜 정서적인 공감에서 의문을 멈춰야 하는지 물으면 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공감하는 대상이 다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어느쪽 공감을 멈춤 지점으로 삼아야 할까.
정서적 공감은 도덕적 판단의 유일한 전제가 될 수 없다. 윤리학자들도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할지 합의하지 못한 탓에 논쟁이 끝나지를 않는데, 정서적 공감이 무슨 자격으로 모든 논쟁을 끝낼 수 있을까. 특히 한정된 자원을 나누거나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때, 정서적 공감은 최대 다수가 납득할 만한 답을 제시할 수 없다. 소수자, 약자에게 먼저 공감하라는 주문도 도움되지 않는다. 한 쪽에 공감하기 시작하면 대상을 바꾸기 어렵다는 점을 진보주의자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