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함은 과격함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

인간의 얼굴을 한 진보주의 7화

by 이완

'장애인의 절박함을 헤아려 달라.' 전장연의 지하철 점거를 비판할 때마다 듣는 말이다. 우선 대전제를 밝히자면, 이동권은 모두의 기본권이어야 한다. 정부는 추가 예산을 들여서라도 지하철역사에 더 넓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저상버스를 도입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국가기간시설을 점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절박함은 과격한 행동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


만약 절박함이 행동 근거로 인정받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극우 단체의 시위 현장을 보면, 참가자들은 매우 절박하게 가족과 이웃을 동성애와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고 싶어한다. 다들 울부짖으며 자유와 하나님을 외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나이, 생업, 날씨 상태와 상관 없이 시위 현장에 나와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둘러 왔다. 절박함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절박함이 과격함을 정당화해준다면, 극우의 혐오 시위와 법원 공격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극우 외에는 누구도 극우의 절박함을 알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극우가 용돈을 벌기 위해 시위에 참가한다며 조롱할 뿐이다. 이 외에도 절박함을 보는 시선이 사람마다 달라지는 경우는 흔하다.


따라서 절박함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정당화할 수 없다. 절박한 사람의 목적도 중요하고, 절박함을 지켜보는 사람의 성향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전장연의 경우는 어떨까. 전장연은 이동권과 교육권, 완전한 탈시설을 관철하기 위해 지하철을 점거해 왔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동권은 기본권이다. 이동권이 부족하다는 점도 사실이다. 교육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장애인의 권리만 부족한 것은 아니다. 비장애인 빈곤층도 여러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복지 예산이 적은 곳이라서, 장애인만 특별히 차별한다고 보기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완전한 탈시설이다. 완전한 탈시설은 논란이 많은 요구다. 간병 살인 사건이 보여주듯, 완전한 탈시설은 각 가정에 큰 절망을 안겨 줄 수 있다. 완전한 탈시설을 이뤘다는 스웨덴도 사실 더 근사한 시설을 중심지에 만들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무엇보다, 장애인과 보호자 전반이 완전한 탈시설을 지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전장연은 다른 장애인, 보호자가 합의하지 않았고 그 효과도 불분명한 요구를, 마치 모든 장애인의 시급한 요구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그런 요구를 '지금 당장' 실현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정당할까.


전장연의 지하철 점거가 사회를 바꿀 것이라는 주장에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의 타고나는 취향은 입맛 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이나 정치적 선택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몇몇 학자는 정치 성향을 의지로 바꾸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맛있고 즐거우면서 만족감을 주며, 재미있다고 느끼는 자극에 이끌리는 반면, 역겹고 불쾌하며 지루하다고 생각되는 자극을 회피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같은 자극이라도 누군가를 즐겁게 만들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존 R. 히빙,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김광수 역, 오픈도어북스, 2025.


어떤 사람은 공중질서와 공정한 법적 처벌을 강력하게 선호한다. 우리나라처럼 사소한 민폐에 예민하고 범죄 불안감이 높은 곳에서는 더더욱 공중질서에 민감할 수 있다. 실제로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 다수는 저상버스 도입에 찬성하면서도 지하철 점거에 공감하지 못했다. 이는 퀴어퍼레이드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한 인식, 한국리서치 주간리포트(제187-3호), 2022.]


질서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전장연의 지하철 점거는 가치관을 위협하는 행위일 수 있다. '이동권이 부족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이러면 안 되지'라는 생각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호를 바꿔서 전장연의 절박함에 더 공감하게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전장연의 불법 점거는 불필요하게 적을 늘리고 있을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격렬한 시위는 사회적 신뢰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낮추는 경향이 있다. 매끄러운 사회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사회 신뢰가 매우 중요하니, 격렬한 시위는 스스로 목적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반대로 사회적 신뢰가 높으면 시위가 격렬해도 어느정도 수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회적 신뢰가 낮은 편이니, 그만큼 격렬한 시위의 부정적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시위 및 집회 (빈도와 격렬함) 수준이 높게 나타날수록 일상적인 신뢰와 오랜 시간 축적된 신뢰 요소들인 사회적 신뢰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 김강민 외, 시위 집회가 사회적 신뢰에 미치는 영향, 한국지방행정학보 제20권 제2호, 2023.


반면 시위가 과격할수록 사회가 빠르고 안정적으로 변한다고 볼 근거는 거의 없다. 사실, 관련 연구 자체가 많지 않다. 그렇다면 다들 마땅한 근거도 없이 더 크게 소리지르면 언젠가 들어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전장연의 지하철 점거는 좋은 목적을 위한 일도 아니고, 목적 실현에 도움된다고 단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런 행동을 비판하는 것이 장애인 혐오일까.


전장연은 장애인 전반을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더 규모가 큰 법정 장애인 단체와 보호자 단체가 있고, 전장연은 그런 단체와 갈등해 왔다. 전장연은 그저 눈에 띄는 단체일 뿐이다.


그런 단체를 장애인의 대표로 여긴다면, 태국인이나 베트남인을 모든 아시아인의 대표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장애인도 이해관계가 다양하고, 지하철 시위나 탈시설을 보는 관점도 장애인 단체마다 다르다. 그런 이해관계를 한 단체가 모두 대표한다고 보는 것 또한 장애인 소외일지 모른다.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다. 공감은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이은진 역, 시공사, 2019.

매거진의 이전글왜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미움받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