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미움받을까

인간의 얼굴을 한 진보주의 8화

by 이완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진보주의자는 사회적 합의가 이미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제정이 미뤄지는 것은 한국 정치에서 보수적 기독교인이 과다대표되고 있고, 차별금지법에 대한 가짜 뉴스가 유행하는 탓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대체로 진보주의자는 자신의 전략에 부족한 점이 있는지 돌아보기보다 반대자의 인간성을 비난한다. 인권과 정의라는 단어가 타인을 설득하거나 타협안을 마련할 책임까지 덜어주지는 않음에도, 진보주의자는 두 단어의 힘만 믿고 일을 추진하다가 넘어진다.

해외에서도 차별금지법은 논란 대상이다. '비수술 트렌스젠더 여성이 여성 전용 시설을 사용해도 괜찮은가.' '국가가 보수적 기독교인의 양심과 신앙을 무시해도 되는가.' '차별금지법이 동성애자와 공존하는 일에 유용하다고 볼 수 있는가.' 등, 여러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부족하다.

물론 진보주의자에게는 대답이 자명할지 모른다. 그래서 대답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절멸시키려는 태도를 숨기지 못한다. 그런 태도가 드러난다는 점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사회적 합의는 곧 타협이다. 타협은 곧 양보다. 양보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나 내어 주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을 요구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무엇을 내어 줬기에 합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걸까. 저쪽에서 일정 비율 이상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 사립대학교나 종교시설만큼은 차별금지법에서 제외하자고 하면, 진보주의자는 받아들였을까.

양보가 싫다면, 보수적 기독교인을 철저히 소수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나머지를 결속시켜야 한다. 비서구 사회에서 현대 진보주의는 매우 낯선 생각이고, 따라서 다수를 결속시키려면 고양이 사료 속에 약을 숨기듯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이익 속에 조금씩 진보주의를 섞어야 한다. 하지만 진보주의자에게 느린 전략은 비겁함일 뿐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니까.

극우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를 보면, 사람들이 지위 불안, 생활 곤란을 겪고 있는데 진보주의자가 뿌리 깊은 성향 차이를 외면하고 급하게 변화를 추진할 때, 진보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극심해진다. 그런 저항감을 무시하거나 절멸시키려는 무모한 일을 진보주의자가 시도하려 하면, 거기서부터 진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전쟁의 논리만 남을 뿐이다. 이런 내전 분위기가 극우를 키운다.

소수의 악의적인 가짜뉴스만 탓해서는 안 된다. 그런 가짜뉴스가 통하는 것은 사람들의 가려운 점을 긁어주기 때문이다. 애초에 진보주의에 대한 의구심이나 불안감이 없다면, 가짜뉴스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진보주의자가 동성애 혐오를 믿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조지 오웰이 이야기한 것처럼, 파시즘을 퍼뜨리는 것은 언제나 공산주의다.

변화가 늦어지면 그만큼 약자와 소수자는 오래 고통받아야 한다. 그러니 한쪽에만 깊이 공감하는 진보주의자는 변화를 서두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서두른다고 해서 빨리 도착한다는 법은 없다. 때로는 느리더라도 하나씩 이루는 것이 가장 빠른 변화 전략이다. 실제로 서구도 그렇게 빠르게 변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 기혼 여성은 무려 1970년대까지 남편 허락 없이 일할 수 없었다.

언제나 먹는 것이 먼저고, 읽는 것이 다음이고, 논의가 마지막이다. 차별금지법 논의는 이 순서를 어겼다. 그러니 매번 처음으로 돌아갈 수 밖에.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상대방이 겪는 악몽의 세상을 무시할수록 정치적 쟁점을 해결할 효과적인 해법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 존 R. 하빙,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들이 파시즘으로 쇄도해 가는 것은 오로지 경제적인 동기보다 더 깊이 놓여 있는 것들(애국심, 종교 등등)을 공산주의가 공격하거나 아니면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파시즘을 일으킨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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