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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극우화되었을까

그걸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by 이완

진보 진영은 더이상 젊지 않다. 이번 제21대 대선에서 그 사실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20 - 30대 청년 남성 70%는 김문수와 이준석 후보를 지지했다. 지난 대선보다 더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청년 여성의 40%도 보수 후보를 지지했다.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에게 월계관을 준 것은 인구가 많은 민주화 세대, 리버럴 중년이었다.

이 사태를 보고, 진보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 같다. 청년이 우경화를 넘어 극우화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김문수는 내란을 옹호했고, 이준석은 혐오와 갈라치기로 똘똘 뭉쳐 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이런 생각이 아닐까.

하지만 고작 극우화만으로는 청년이 진보를 외면하는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어 보인다. 우선 청년을 한 덩이로 묶어서 본다는 점부터 잘못되었다.

앞세대와 비교했을 때 청년은 더 분열되어 있다. 30대는 스마트폰도 인공지능도 없는 과도기를 기억하고 있지만, 20대는 새로운 기술이 보편화된 시대를 더 많이 겪었다. 남자의 경우, 30대 후반은 군대에서 매달 50만 원 미만을 받으며 2년 넘게 복무했지만, 20대 초반은 100만 원 넘는 월급을 받으며 1년 반을 복무했다.

기술과 경제상황, 사회제도가 너무 빨리 바뀐 바람에, 2030도 서로에게 동질감보다 이질감을 더 많이 느낀다. 서로 동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경험을, 청년들은 공유하고 있지 않다. 노동자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여성과 남성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단일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것처럼, 청년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보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누구도 청년 전체를 대표하고 있지 않다. 이준석도 그렇다. 청년끼리도 서로 너무 다른데, 청년 남녀 절반이 이준석과 김문수를 지지하는 현상을 극우화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물론 극우화 현상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대체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 연구가 부족하니, 여기서는 개인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진보주의자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다. 시장 경쟁이 공공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하려면, 정부가 토지와 금융에 개입하며 불로소득에 의한 기회 격차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진보 정치인을 적극 지지하지 않는다. 진보 정치인 중에 마음 놓고 지지할 만한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2023년 2월 1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민주당 권인숙 의원이 한동훈 법무장관과 맞붙었다. 주제는 비동의강간죄이었다. 동의를 입증할 책임이 검사가 아니라 피고인에게 전가될 가능성을 근거로, 한동훈 장관은 입법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부분을 권인숙 의원이 문제 삼았는데, 그 방식이 나빴다.

우선 상대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마이크가 꺼졌는데도 자기 말만 쏟아냈다. 당시 영상을 이어폰으로 듣다보면 귀가 아플 정도였다. 권인숙 의원은 상대를 같은 성인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이 다르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권인숙 의원을 옹호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권인숙 의원은 진보 정치인에게 실망하게 된 수 많은 계기 중 하나였다. 권인숙 의원 뿐만 아니라, 상당수 진보 정치인, 또는 진보 인플루언서는 생각이 다른 사람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진보적 가치를 체화하지 않은 청년과 노인을 제거되어야 할 암세포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저 사람들 앞에서 다른 의견을 냈을 때 무사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더 많은 평등을 외치면서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와 관용을 거부하는 것이, 내게는 진보에 대한 배신으로 보였다. 극우화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 책임을 개인에게 묻기 전에 사회적 문제부터 살피는 것이 진보적인 사고방식 아니었던가. 진보주의자의 꼰대질은 정말 진보적인가.

그렇다고 내란 세력과 사이비 능력주의자를 지지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념 차이 때문이었다. 나처럼 뚜렷한 이념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진보 정치인이나 보수 정치인이나 거기서 거기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재명 후보의 승리가 너무 선명하니까 견제구를 던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극우파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청년은 균질한 집단이 아니고, 특정 후보에게 표를 줬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청년의 극우화는 다소 과장일 수 있다. 애초에, 지금 진보는 당당하게 지지를 호소할 만하지 않다. 그 점을 되돌아 보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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