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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또 실패했다

0.98%라는 초라한 성적

by 이완

0.98%, 34만 표. 권영국 후보와 민주노동당의 성적이다. 34만 표면 노동조합 전체 조합원의 8분의 1 수준이다. 노동계급은 커녕 소수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지지조차 얻지 못한 셈이다. 이런 성적을 받고도, 좌파는 공약과 전략을 되돌아 보지 않고 있다. 다 잘했는데 시국이 나빠서 졌다는 식이다. 그나마 졌다고 인정하는 쪽은 양반이다.

대선이 끝난 후, 권영국 후보는 잘 싸웠다고 자평했다. 그 지지자들도 진보의 불씨를 살렸다며 좋아하고 있다. 8%를 받은 이준석도 '내 탓이오'라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1%도 얻지 못한 사람이 본인 득표율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날 것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런 태도는 대중에게 지지받으려는 정당이 아니라 약소 스포츠팀 팬클럽에게나 어울린다.

민주화 이래로, 좌파는 나쁜 공약과 전략으로 일관했다. 안보 불안을 외면했고, 외국도 실패한 다문화주의에 대한 우려를 혐오로 치부했다. 소소하게 바뀐 점이 있었다지만 근본은 그대로였다. 이 모든 기조의 배후에는 국경을 초월하는 평등주의 이념으로 타고난 공정성 감각과 부족주의 정서를 이길 수 있다는 비과학적 미신이 있었다. 좌파는 '평등주의적인 세계시민'을 전제했지만, 그런 인간관은 호모 이코노미쿠스보다 유용하지 않았다.

평등이 공정과 부족을 뛰어넘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 뿐이다. 그 날의 이타적 충동이 경계를 뛰어넘게 했거나, 서로 깊게 사랑하거나. 둘 다 국가 정책의 기반으로 삼을 수 없을 정도로 희소한 상황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사람은 애착을 느끼는 대상, 동질감을 느끼는 대상에게 더 친절하고 협력적이다. 물론 낯선이를 마냥 배척하지는 않지만, 그 낯선이와 희소한 자원을 두고 마주하게 되는 순간 부족주의 정서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좌파는 이런 인간적인 면까지 차별주의와 혐오주의로 규정했다. 평등주의 이념을 체화할 기회가 없던 사람들을 진정시키기보다, 계몽시켜야 할 우민으로 단정하며 자극했다. 어찌보면, 기성 좌파는 또 다른 인간 혐오자인지도 모른다.

동물권, 상속세 90%, 차별금지법 등 기성 좌파의 공약은 증명이 다 끝난, 충분히 정의로운 방향이 아니다. 좌파가 보기에도 부족한 점이 많은, 개선되어야 하는 방향이다. 그런데 기성 좌파는 누구도 건설적인 논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충분한 근거 없이 답을 정해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을 동등한 위치의 대화 상대로 대우하지 않는 사람이 평등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단언컨대 기성 좌파는 실패했다. 그리고 이는 '좌업좌득'이다. 계몽되어야 하는 것은 청년이 아니라 좌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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