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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은 트럼프, 하지만

트럼프만 탓할 수 없다

by 이완

12월 3일, 무장한 군인이 서울 한복판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공포스런 상황을 공유했다. 평소 서울에 무장 군인이 나타날 일이 거의 없으니까. 많은 사람의 역사적 기억을 자극한, 비상계엄의 밤이었다.

지금 미국 사람은 매일 계엄령을 겪는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에서는 연방군이 아니라 이민세관집행국, 일명 아이스(ICE) 소속 무장 요원이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아이스 요원은 트럼프의 명령에 따라 불법체류자를 색출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이 너무 거칠다. 아이스 요원은 이미 합법적으로 정착한 사람까지 무분별하게 체포하고 있다. 실수로 추방한 사례도 있는 모양이다. 심지어 친트럼프 민병대까지 준동하고 있다고 하니, 미국을 자유주의 세계의 일원으로 볼 수 있을지 애매한 상황이 된 것 같다.

하지만 트럼프의 지나친 강경책을 극우 포퓰리스트만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극우 포퓰리스트의 준동까지 포함해서 여러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는 가능성을 미리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상에 빠진 사람만 빼고.

남미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수 많은 사람이 멕시코를 지나 미국 남부로 들어왔다. 그 탓에 텍사스 등 미국 남부의 불만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이는 여론조사로도 드러났다. 지난 미국 대선 때 이뤄진 BBC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은 경제와 인플레이션보다 이민 문제를 더 큰 걱정거리로 꼽았다. 바이든 대통령의 정책 중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것 역시 이민 정책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난민이 현지 주민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여럿 일어났다. 리버럴 엘리트는 이런 사건이 난민 전체에 대한 혐오로 확산하지 않도록 훈계하는 데 집중했을 뿐, 사건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는 사실상 논의하지 않았다.

미국은 난민이 살 곳과 일할 곳을 마련하지 않았고, 자국민에게도 그런 걸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규모 난민을 받았을 때 여러 문제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꽤나 자명했다. 유럽이 먼저 겪었으니까.

하지만 리버럴 엘리트는 일부 잘 적응한 사례와 통계 일부만 부각시키며 문제에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감당 가능한 선에서 숫자를 조절했더라면, 무분별한 시장 개방이 아니라 보다 현명한 방식으로 남미의 경제개발을 지원했더라면, 억울한 죽음과 추방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사람이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것은 심리학 연구와 범죄 통계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잘 정착한 이민자는 괜찮을지 몰라도, 나라를 잃고 떠도는 난민은 상황이 너무 다르다. 난민이 일으키는 범죄는 공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고, 난민 유입 이후 불만을 가진 자국민이 일으키는 범죄도 상당하다. 갑작스런 인구 유입은 이 모든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간혹 난민 유입과 지역 범죄율 사이에 뚜렷한 상관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연구도 있지만, 이는 통계를 잘못 인용하거나 여러 조건을 살피지 않은 사례다. 터키에서 시리아 난민이 범죄를 덜 일으켰다는 사실이 스웨덴에서 폭증한 갱단 문제를 덮어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처음 범죄율이 치솟다가 나중에 범죄율이 낮아진다는 사실이 이미 범죄를 겪은 가람들의 감정을 진정시켜 주지는 않는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게 남성의 범죄율 하락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어떻게 여겨지는 뻔하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감정은 자신만의 논리를 따를 뿐, 통계를 핵심적인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통계를 근거로 가짜 공포와 진짜 공포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범죄를 겪어도 외면당할 것이라는 공포를 자극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난민에게 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하면 된다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그런 단순한 발상은 결국 난민 혐오를 자극한다. 정부가 자국민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못대로 국경을 침범한 사람에게 제공한다는데, 불만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각자가 이타심으로 기부하는 것과 정부가 한정된 자원을 정책으로 배분하는 것은 같지 않다.

어떤 난민이 어느 곳에서 왜 범죄를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하다. 그러니 난민이 반드시 범죄를 일으킨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난민이 반드시 안전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저쪽의 근거 부족이 이쪽의 근거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난민 유입이 범죄와 관련이 깊다는 연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노동 시장, 특히 비숙련 노동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수록 , 난민의 증가는 원주민과 난민 모두의 범죄율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 The crime effect of refugees, VOX EU

어떤 조건에서는 분명 난민의 범죄율이 높고, 사람들은 통계적이지 않은 사고방식으로 이방인의 범죄를 두려워한다. 이 부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예상 가능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에 대비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전세계의 리버럴 엘리트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지만.

따라서 트럼프의 폭주에는 리버럴 엘리트의 책임도 있다. 눈 앞의 문제에 눈을 감고,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내몰아간 결과가 트럼프의 당선이니까. 2022년 6월 이후로 미국 물가는 빠르게 안정되었으니, 단순히 물가 때문에 트럼프가 이겼다는 억지는 통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금 미국의 모습은 리버럴 엘리트들의 실패 현장이기도 하다. 스웨덴이 그런 것처럼. 리버럴 엘리트는 편하게 트럼프와 인종차별주의자를 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 소수 난민이 모욕과 가난, 범죄에 빠지게 한 원인을 제공했으니까. 리버럴 엘리트가 혐오라는 편리한 말 뒤에 숨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

이제는 무익한 비난을 거두고, 무제한적 개방과 무분별한 추방 사이에서 국익을 위한 균형을 찾기 위해 논의해야 할 때다.

참고자료

어떻게 이민자 문제가 이번 미 대선의 핵심 쟁점이 됐나, BBC News 코리아, 2024. 3. 4.

[팩트체크]‘유럽의 골칫거리’ 난민, 받아들일수록 범죄율 높아질까, 매일경제, 2023. 9. 12.

한국은행 금융 경제 스냅샷, 미국 소비자 물가 상승률.

Belgi Turan 등, The crime effect of refugees, VOX EU, CEPR, 2022. 7. 24.

데이비드 굿하트,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김경락 옮김, 원더박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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