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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하는 평등주의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평등에 대해

by 이완

일상에서 평등을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갑질을 저지르는 평등주의자도 꽤 흔하다. 자신도 실천할 수 없을 만큼 평등의 의미를 부풀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평등을 외치면 얻을 것이 많아서 그런 걸까.


가장 중요한 평등은 사회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평등이다. 권력 격차 탓에 상대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수 있는 상태, 서로를 동료라고 여기거나 적어도 상대에게 억울하게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상태, 그런 상태야말로 사회가 달성해야 하는 근본적인 평등이다.


왜 그런 평등을 달성해야 할까. 최대 다수의 행복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좋은 관계 속에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다. 넓게는 신뢰하며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좁게는 애착을 느낄 수 있는 소수의 편한 사람이 필요하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좋은 관계에 속할수 있으려면 관계를 가로막는 사회적 장애물, 특히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권력 격차를 최소화해야 한다. 권력 격차가 큰 관계에서는 갑질 같은 불공정한 일이 일어나기 쉽고, 불공정한 일은 관계를 깨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권력 격차가 너무 큰 관계에서는 부패가 자라나기 쉽다. 서로의 문제점을 편하게 지적할 수 없으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비윤리적인 행위를 자각하고 고칠 기회를 잃는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의 비위에 맞추느라 똑같이 비윤리적인 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질 나쁜 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처럼.


동등한 관계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일상 속 부패를 예방한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계층으로 이뤄진 사회가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돕는다. 부유층은 부유층끼리 어울리고 빈곤층은 빈곤층끼리 어울린다면, 사회는 정말 유전자 단위로 분열될 수 있다. 서로 어울린 적이 없어서 다른 계층의 처지에 대해 전혀 모른다면, 결국 사회는 공멸적인 계급 투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여러 계층이 편하게 어울릴 수 있어야 서로 정보도 나누고 신뢰도 쌓을 수 있다. 권력의 장벽이 오랫동안 갈라놓은 관계에서는 그런 작업을 시작하는 일조차 어렵다. 관계 속 불편함은 계급 격차가 계급 갈등으로 치닫게 하는 첫걸음인 셈이다. 고대와 현대의 현명한 부유층이 친절함과 검소함을 강조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물론 동등한 관계 맺기가 수월해진다고 해서 모두와 친해질 수는 없다. 모두가 모두에게 친절할 수는 없고, 모든 상황에서 모두를 동등하게 대우할 수는 없다. 맹목적인 평등주의는 좋은 사회라는 더 중요한 목적을 망친다.


다만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타인에게 공포를 느끼고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평등한 문화가 있을 때 좋은 관계를 얻을 가능성을 키울 수 있다. 사회가 행복을 보장해 주기는 어렵지만, 행복을 막는 사회적 장애물을 함께 치울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 상당수는 동등한 관계라는 감각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칭 평등주의자도 그렇다. 상대보다 나이가 많으면, 학위가 높으면, 직업이 좋으면, 그에 걸맞게 더 높은 지위로 대우받으려 한다. 물론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가 지위 그 자체에 존경을 강요할 권력을 주기 때문이다.


권력은 그 자체로 쾌락이라서, 불평등한 관계는 사람을 권력에 취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 일상은 갑질로 가득 찬 것이다. 평등주의자들끼리도 평등을 실천하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평등은 공상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상대의 관대함에 기대야 안전할 수 있는 관계가 흔하고, 근거 없는 우월감에 취해 갑질하는 평등주의자가 활개치는 한,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평등을 달성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사회주의체제에도 계층이 존재할까? 정당, 종교, 노동조합, 전문가협회, 클럽, 정파, 파벌에 더해서 새로운 전문가 집단까지 존재해야 할까? 물론이다. 아마도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겠지만 항상 대화하고 서로 혼인도 할 수 있는 조건, 그러니까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엄청나게 많은 계층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 조지 버나드 쇼, 영국 사회주의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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