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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착취하는 돌봄노동

일부 영역에서 성차별은 현실이다

by 이완


가정에서든 병원에서든, 우리나라 여성은 적은 보상으로 많은 사람을 돌보고 있다. 이는 통계로 드러나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장기요양 종사자 중 여성의 비중이 95%에 달한다. 여기서 장기요양 종사자는 유급 고용 계약을 맺고 장기요양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 즉 간호사나 요양보호사를 가리킨다. 최근 남성도 간호사나 요양보호사에 지원하는 경우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오랜 시간 축적된 성비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다.


물론 성비만 따졌을 때 우리나라가 특별히 여성을 차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상당한 성평등을 달성한 스웨덴과 덴마크에서도 주로 여성이 돌봄노동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남녀에게 상당히 동등한 기회와 선택권이 있는 곳에서도 성비 차이가 난다면, 구조적 차별보다는 타고난 성향 차이와 더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차별이 드러나는 곳은 성비보다 임금 격차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돌봄노동은 대체로 저임금 직종이다. 공공부문의 비중이 크지 않아서 안정성도 떨어진다. 집에서 장기요양 종사자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돌보는 경우에는 낮은 임금조차 없다. 특히 집에 중증환자가 생기면, 주로 여성이 경력을 포기하고 무상 돌봄노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장기요양 종사자의 성비가 성차별의 문제인지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하지만, 확실히 우리나라는 여성이 주로 종사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돌봄노동을 저임금 일자리인 채로 방치하고 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우리나라는 여성을 착취해서 돌봄노동 수요를 감당하고 있다.


장기요양 종사자의 성비와 다르게, 돌봄노동과 무관하지 않고 고소득 직종인 의사의 성비는 성차별의 결과인 듯하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주요국에서 여성 의사가 가장 적은 곳이다. 최근에는 여성 의대생이 늘었다지만, 역시 지금까지 축적된 성비를 뒤집을 만큼은 아닐 뿐더러 지금도 남성 의대생 비중이 매우 높다.


의사 성비 문제에서는 타고난 성향의 영향이 크지 않은 듯하다. 성평등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나라, 특히 옛 공산권과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여성 의사 비중이 절반 이상이니까. 그 중에는 70%가 넘는 곳도 있다. 결국 '여자가 의대를 가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에 달려 있는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구조적 차별이 의대 성비에 큰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여기서 구조란 곧 사회적 규칙이다. 모든 사회에는 규칙이 있다. 헌법처럼 글자로 표현된 규칙도 있지만, 인사법이나 상처받은 친구를 위로하는 법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자리잡은 규칙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규칙을 따르는 사람을 정상,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비정상으로 여긴다. 이런 규칙이 바로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구조'다.


대체로 사람은 규칙을 잘 파악해서 정상으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사람들과 다퉈야 할 수 있는데, 사람의 뇌는 구두쇠라서 괜한 곳에 에너지를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람은 철저히 사회적 동물이라 무리에 속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긴다. 그래서 사회적 구조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사회적 구조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이다.


간혹 용기 있게 비정상을 자처하며 구조를 깨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햇빛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사례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 평가나 처벌에 둔감하거나 자신만의 세계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타고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선각자 같은 부모나 친구를 통해 다른 세상을 접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남다른 조건에서 나타나는 극소수의 사례만으로 대다수의 패턴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무상교육을 도입하지 않은 곳이다. 특히 의대는 가장 비싼 학교다. 군사정부 시대까지만 해도, 부모는 딸을 비싼 학교로 보내지 않았다. 장녀에게 일을 시켜서 차남을 대학에 보냈다는 경험담도 있다. 지금도 교육비가 한정되어 있을 때 딸을 위해 아들의 교육을 포기하는 집안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에는 지금보다 폭력에 더 둔감했으니, 여성이 굳이 위험을 무릎쓰고 위계질서 엄격한 남자들의 세계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0년대부터는 남존여비가 다소 옅어졌다. 그럼에도 '여자는 집안일, 남자는 바깥일' 같은 남존여비의 잔재들이 사회 구조로 남아 있다. 남성의 가사분담률이 많이 개선되고 있다지만, 여전히 여성이 남성보다 3배 많은 가사를 담당한다. 맞벌이가구여도 마찬가지다. 경력단절도 여전히 여성의 문제다.


그렇다면 직업에 대한 인식도 여전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과거처럼 부모가 딸의 기회를 박탈하거나 여성이 남자들의 세계에 진출하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지는 않지만, 한 번 자리잡은 구조는 습관처럼 오래 살아남기 마련이다.


'의사는 남자의 직업'이라는 인식이 매우 약해젔다고 하더라도, 동성 친구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가는 편이 사회적 욕구 면에서 이득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배척과 기회 박탈이라는 강력한 처벌 탓에 구조가 유지되었다면, 지금은 사회적 관계라는 이득 탓에 구조가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성별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에 선뜻 들어가지 않는다. 특히 여성의 경우, 괜한 추근거림과 성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남성이 많은 곳을 기피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남자가 잠재적 가해자는 아니다. 다만 여성 입장에서 보면, 남성을 일반화해서 경계하는 것이 자기 방어 면에서 합리적이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가장 눈에 띄는 특성이 남성이니까. 이런 일반화는 누구나 타고나는 사고방식이자 자기 방어 전략이라서 혐오라고 부르기 어렵다. (외국인을 경계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장혜영 의원 같은 사람이 백분토론 성비처럼 우연일 수 있는 상태를 두고 구조적 차별 운운하는 바람에, 구조적 차별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우스워졌다.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모든 남성을 기득권자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바람에, 괜한 감정 싸움이 반복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구조적 차별은 현실이다. 과거보다 약해졌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구조적 차별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돌봄노동의 영역이다.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돌봄노동 종사자에게 사회적 소득을 지급해야 한다. 여대 의과대학을 유지하는 일도 필요할지 모른다.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모두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진짜 성평등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


"여성에게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기회를 주고, 직업 선택의 자유도 주고, 그리고 남성과 똑같이 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대가나 상도 똑같이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생기는 두 번째 이득은, 인간 사회를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정신 능력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공립학교 선생이나 공공 업무를 담당할 행정관으로서 인류에게 도움을 주고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현재는 하나지만, 이제 그 수가 둘로 늘어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존 스튜어트 밀 선집, 서병훈 옮김, 책세상,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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