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굶주리는 영국 아이들

고든 브라운 총리의 The Child Poverty Emergency

by 이완

영국 아이들이 굶고 있다.


2025년 5월, 고든 브라운 전 총리는 아동 빈곤 위기를 알리는 ‘The Child Poverty Emergency’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4월 영국에서 상대적으로 빈곤한 아동 수는 450만 명에 달했다. 전체 아동의 31%다. 일부 지역에서는 아동 빈곤율이 40% 이상으로 관측되었다. 특히 버밍엄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빈곤 아동 수가 6.8만 명에서 10.4만 명으로 치솟았다.


가처분소득의 50%를 기준으로 삼는 OECD 통계에서도 최근 영국의 아동 빈곤율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2023년 영국의 18세 미만 빈곤율은 15.8%로, 이는 덴마크나 핀란드의 4배 수준이다. 2022년 한국 18세 미만 빈곤율이 9.5%이니, OECD 통계에서 영국의 아동 빈곤율은 덴마크와 우리나라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



빈곤의 확산은 건강 문제도 일으키고 있다. 2022년 기준, 스코틀랜드에서는 구루병에 걸린 아동이 5년 동안 33%나 늘었다. 2024년 잉글랜드에서는 결핵 아동 수가 5,480명에 달했다. 이는 2023년보다 13% 증가한 수치다. 심지어 괴혈병과 홍역도 확산하고 있다. 하나 같이 빅토리아 시대에나 유행하던 질병들인데, 현대 영국에서, 그것도 아동 사이에서 다시 유행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빈곤의 원인을 게으름으로 지목하는 듯하다. 이미 애덤 스미스가 빈곤의 사회적 원인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음에도 편견은 굳건했다. 하지만 브라운 전 총리는 빈곤층의 절반 이상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2023년에는 저소득 - 중산층 가정 어머니의 고용률이 58%로 상승했다. 일하지 않아서 빈곤한 집은 편견만큼 많지 않은 셈이다.


사실, 영국의 아동 빈곤이 줄곧 상승세였던 것은 아니다. 2000년부터 2010년 사이에는 빈곤율이 서서히 하락하고 있었다. 당시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노동당 정부는 아동 빈곤 퇴치를 핵심 국정 과제로 설정하고 복지 개혁을 단행했는데, 대표적으로 기존의 복잡한 소득 지원 정책을 ‘아동 세금 공제 Child Tax Credit’로 통합한 다음 지원 규모를 확대했다. 아동 세금 공제는 부모의 근로 여부와 상관 없이 국체성의 소득 조사를 통해 차등적으로 아동 수당을 지급하는 정책이었다.


당시 노동당 정부는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일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개개인의 노동 능력을 키우는 데 초점을 뒀다. 건강을 지키며 교육받을 기회를 보장해서 빈곤과 실업 문제를 겪을 가능성을 낮추려고 한 것이다. 전통적인 복지국가가 실업자에게 실업급여를 주는 데서 멈췄다면, 노동당의 새로운 복지국가는 애초에 실업자가 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사전 개입’에 무게를 실었다. 이는 북유럽의 적극적 노동정책, 사회투자정책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평등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책을 크게 바꿔야 할 것이다. 아동 빈곤문제는 다른 많은 문제들의 뿌리라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동 빈곤을 줄이는 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을 빈곤문제 전체의 선도 분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앤서니 기든스,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김연각 옮김, 인간사랑, 2007, 179p.


개혁은 지속되지 않았다. 2010년 5월, 영국 노동당은 보수당의 젊은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에게 정권을 잃었다. 경제성장 등에서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한 탓이었다. 캐머런은 노동당 사회주의자의 큰 국가론과 보수당 대처주의자의 최소 국가론을 모두 거부하는 ‘큰 사회론’을 앞세우며 당을 통합하고 선거를 이끌었다. 그 핵심은 정부가 모든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보다 가족과 지역사회, 시민사회를 지원해서 국가에 대한 의존을 억제하는 동시에 사회안전망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국가 개입을 억제하고 재정 건전성을 회복한다는 이유로, 캐머런 내각은 각종 복지혜택을 축소했다. 브라운 총리의 보고서에 따르면, 캐머런 내각은 가족 수당을 올리지 않았고, ‘두 자녀 제한’을 도입해서 셋째 자녀부터는 아동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담당 공무원이 재량적으로 대출과 현금을 지급할 수 있는 복지제도였던 ‘국가 사회 기금 National Social Fund’를 폐지하고, 그 역할 일부를 지방정부에 떠넘겼다.


그 결과, 지방정부와 푸드뱅크 등 자선단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다. 문제는 수 많은 빈곤 아동을 지원하기에는 지방정부와 자선단체의 능력이 매우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캐머런 총리는 지역, 시민사회가 국가의 역할을 대체하기를 바랐지만, 사회는 국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이렇게 2010년부터 정부가 뒤로 물러선 탓에 많은 가정과 아이들이 빈곤에 노출되었고, 이 아이들을 영국에서는 ‘긴축의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빈곤 속에서 자라는 거의 모든 아이들은 '긴축의 아이들'이다. 즉, 2010년 이후 긴축 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소년 소녀들이다.”

- 고든 브라운 총리, The Child Poverty Emergency


2024년 7월, 키어 스타머 당수가 이끄는 노동당은 드디어 기나긴 보수당 집권기를 끝냈다. 이 선거에서 노동당은 하원 의석의 63%를 차지하며 블레어 총리 이래로 최대 승리를 거뒀다. 스타머 내각은 아동 빈곤에 대응하기 위해 집권 초부터 아동 수당을 올리고 보육 지원을 확대했다. 하지만 주거비 문제에 대응하지 못한 바람에 아동 빈곤을 충분히 억제하지 못했다. 보다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대응이 없다면, 아동 빈곤율은 노동당 집권기에서도 상승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스타머 내각은 무엇을 더 해야 할까. 보고서에서 브라운 총리는 도박 이익에 중과세해서 재원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지난 10년 동안 영국에서는 온라인 도박 사업이 크게 성장했다. 그 탓에 2013-14년(영국 회계 연도)에는 99억 파운드였던 도박 이득이 2023-24년에는 151억 파운드로 늘어났다. 그런데 도박에 대한 세금이 높지 않았다.


예를 들어, 슬롯머신의 순수익에 부과되는 간접세율은 10% 수준이었다. 브라운 총리는 여러 도박세를 올렸더라면 2023-24년에 14억 파운드를 더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외에도 영란은행을 개혁해서 공공지출을 억제하는 등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대책을 보고서에 나열헀다. 이렇게 확보한 재원으로, 브라운 총리는 두 자녀 수당 제한을 폐지하고 수도요금과 가스요금을 지원할 것을 제안한다. 물론, 자선단체나 경제인과의 연계도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영국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본고장과 같은 곳이고, 독일과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에도 이념과 정책 양쪽으로 큰 영향을 미친 나라다. 또한 1910년대와 20년대에 토지 양도소득세와 상속세를 통해 여러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보건서비스를 도입해서 복지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라다. 하지만 비효율에 둔감한 노동운동과 그런 비효율을 없애기 위해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린 대처리즘은 ‘아이들이 굶는 영국’을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윈스턴 처칠은 영국이 바다를 지배하지만 하수구를 관리하지 못하는 제국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제 영국은 바다도 지배하지 못하고 하수구도 관리하지 못하는 소국이 되었다. 최근 영국에서 포퓰리즘이 급성장하게 된 데는 이런 원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아동 빈곤을 잘 예방하지 못하고 있으니, 남의 일이 아니다.


"가난의 고통이 자연 법칙 탓이 아니라 우리 제도 탓이라면, 우리의 죄가 매우 크다."

- 찰스 다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