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능력주의는 부족하다

Meritocracy의 원래 의미

by 이완
이미지는 제미나이로 그렸다. 인물은 앙리 드 생시몽.


어쩌면 '능력주의'라는 번역어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우리말 '능력'은 머리 좋고, 시험 문제 잘 풀고, 돈 잘 버는 힘 또는 역량을 가리킨다.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물질주의 문화와 맞물려서 매우 좁은 의미로 통하고 있다.

하지만 Meritocracy에서 Merit는 마땅히 인정받고 보상받을 만한 업적, 자격, 탁월함 등 더 넓은 의미를 가진 말이다. ability가 아니라 Axia(가치), desert(응분)와 더 어울리는 말이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공공이익에 상당히 기여한 극소수에게 'Merit' 훈장을 수여한다.

우리말 능력 역시 인정받을 만한 자격에 포함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모든 능력이 마땅히 인정받을 만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좋은 머리로 사기를 치는 사람 중에는 굉장한 능력자가 많다. 일상 속에서 우리말 능력은 그 자체로 도덕성이나 공공이익을 감안하지 않는 말이다.

반면 Merit는 사회적 인정, 공공이익 같은 가치 판단을 포함하던 말이다. Merit는 맥락에 따라서 우리말 능력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역시 맥락에 따라서 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능력(Merit)은 가치, 품질, 미덕, 탁월함 등을 내포한다. 만약 능력주의자들이 바라는 대로 능력 위에 사회를 건설하려면,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능력에 대한 개념적 분석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사했듯이, 능력은 맥락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 토마스 멀리건, Meritocrac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3.08.03

그래서 능력주의자들 사이에서도 Merit란 무엇인지에 대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고작 수능 시험 잘 본 사람에게 학위와 일자리를 주는 것은 Meritocracy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 되묻고, 자격이 없을 경우 가차 없이 끌어내리는 것 역시 Meritocracy다. 서로가 같은 규칙 아래에서 경쟁하고, 승자는 영광을 누리며 패자는 승복하는, 그런 청춘 스포츠물 같은 세상이 아니라, 여말선초처럼 폐가입진, 역성혁명까지 각오하는 세상 역시 Meritocracy라고 할 수 있다.

물론, Meritocracy라는 말을 퍼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마이클 영은 Merit를 매우 비좁게 정의했다. 영이 말한 Merit는 ‘지능IQ + 노력’이었다. 사실상, 우리말 능력주의에 가깝게 정의한 셈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당시 영국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Meritocracy는 원래 어원에 어울리는 의미까지 갖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용기, 절제, 품위, 지혜에 대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플라톤식 지식인 통치(epistocracy)도 Meritocracy로 통한다. 서구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플라톤식 이상사회에 가깝다고 착각한 동양의 과거제와 문벌사회도 Meritocracy라고 불린다.

사회과학의 조상 격인 앙리 드 생시몽은 토지 귀족이나 성직자가 출생 덕에 모든 것을 누리고 있을 뿐 산업에 종사하지 않는 불로소득자라고 비판했다. 대신 금융인, 기업인, 노동자 등 산업 종사자들에게 권력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제자들은 스승의 주장을 확장해서 경제적 지대와 상속권까지 폐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런 사회주의 사상 역시 Meritocracy에 포함된다.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 역시 출생 신분이 아니라 ‘덕과 재능’에 따른 위계질서를 만들려고 했는데, 이런 ‘아메리칸 드림’도 Meritocracy의 한 모습으로 통한다.

그런 점에서 이준석 의원이 지지하고 박권일 작가가 비판하는 능력주의는 Meritocracy의 전부일 수 없다. Meritocracy의 모호함 또는 광대함을 그대로 표현하려면, 능력주의가 아니라 공적주의, 자격주의로 번역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