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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동반자법

타이밍이 나쁜 시도

by 이완

신, 구교할 것 없이 영적 전쟁이라도 선포할 분위기다. 용혜인 의원 등이 사전 작업도 없이 생활동반자법을 발의한 뒤로,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예상된 반발을 시작했다. 사실상, 생활동반자법이 동성애 지지, 동성혼 법제화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동성애에 생리적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사실 생활동반자법은 그렇게 낯선 제도가 아니다. 서구에는 진작 도입된 시민결합제도의 응용이니까. 그 쓸모도 확실하다. 국가와 개인 사이의 중간 공동체는 사람들에게 안정된 소속감, 애착감을 줄 수 있다. 애국심 같은 큰 집단에 대한 사랑도 소속감을 주지만, 그런 원거리 소속감은 사람의 필수 욕구인 애착감을 충족시켜 줄 수 없다. 태극기와 공무원이 사람을 보듬어 줄 수는 없으니까.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에게는 서로 빈번하게 교류하며 의지할 수 있는, 애착 있는 소수가 필요하다. 자녀나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이 고난 속에서도 애써 기운을 내는 것처럼, 애착 관계는 삶을 견디는 동력이자 행복의 근원이다. 그래서 펫 로스가 심각한 우울감을 동반하는 것처럼, 애착 관계의 붕괴는 절망과 죽음을 초래한다.

그런데 산업화가 사람들을 원자화시켜버렸다. 1960년대부터 많은 사람이 취학하고 취업하기 위해 상경했다. 과거에는 네비게이션도 없이 어떻게든 고향에 모였고, 그것이 사람 도리로 통했지만, 과로와 저소득,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이 도리의 기준을 바꿨다. 이제는 같은 동네에 사는 부모도 찾아가지 않는 시대이고, 아예 결혼 자체를 기피하는 시대다. 즉, 중간 공동체의 핵심이던 가족이 붕괴했다.

많은 사람이 사이비 종교에 의존하게 된 것도 가족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동네 교회는 형식적인 의례만 반복하다가 서로의 생활수준을 비교하기 쉬운 곳이라, 애착감을 주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사이비 종교는 모두에게 똑같은 생활방식을 주입하는 동시에 누구에게든 친절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가스라이팅을 동반하더라도 애착감을 줄 수 있다. 동질성으로 뭉친 팬덤도 비슷하다. 가족과 교회가 사라진 곳에, 불량식품 같은 대체제들이 들어서고 있는 셈이다.

이제와서 전통 가족을 되살리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다고 사회가 알아서 끈끈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서로에게 의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결혼이라는 제한되고 묵직한 계약 대신 다른 계약을 맺을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각자의 자발적 계약으로 가족만큼 무겁지는 않지만 경제적으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한다면, 사람들에게 애착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공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생활동반자제도는 사이비 종교과 극성 팬덤 문화에 균열을 낼 수도 있는, 작은 물줄기와 같다. 물론 생활동반자 공동체가 다수에게 애착감을 주리라는 법은 없지만, 공동체는 하나라도 남아 있는 편이 낫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과 교회 등 기존 중간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들어간 먼지 같을 수 있다. 아마 보수적 기독교인들네게는 동성애자 커플을 이성애자로 '교화'할 기회를 빼앗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원민경 장관이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바꾸려는, 무의미한 이름 전쟁을 또 다시 시작해 버린 상황이다. 이름을 놔두고 개혁만 추진하는 것도 가능할 텐데, 원민경 장관은 굳이 이름부터 바꿔서 적을 만들고 일을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생활동반자법의 취지를 재차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보수층은 분노했다.

물론 지금은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고, 야당은 지리멸렬한 상황이다. 이럴 때 다수결로 밀어붙인다면, 생활동반자법을 통과시키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당 내 기독교인의 반란표가 나올 가능성도 있고,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일을 추진하면 다음 정권이 생활동반자법을 살려둘지 미지수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부는 목소리 큰 집단을 결코 외면할 수 없으니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복잡한 사회일수록 자명하게 옳은 것을 찾기란 더더욱 어렵다. 법의 취지가 무엇이든, 생활동반자법은 도덕 갈등의 소재가 되었다. 도덕이 논리만의 영역이 아닌 만큼, 생활동반자법은 보다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였다.

다시 말해 일처리가 섣불렀다. 용혜인 의원이 대중에게 잊혀지지 않기 위해 생활동반자법을 이용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뜬금 없다. 사전에 최대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작업이 아무것도 없었다. 금융실명제를 도입할 때와 같은 정교한 작전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아무런 전략 없이 시기를 고른 것처럼 보인다. 대체 선출 정치인의 역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만약 소란 끝에 법안이 흐지부지되면, 충성스런 평등주의자가 아닌 정치인들이 다음에도 생활동반자법에 관심을 가져줄까. 국회의원 다수가 교체되거나 사회 분위기가 극적으로 바뀌기 전까지, 생활동반자법을 다시 꺼낼 수나 있을까. 사회적 공감대가 꽤.이뤄진 편이었던 종합부동산세와 금융투자소득세도 버티지 못했는데, 생활동반자법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일이 잘 풀리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진보가 더 미뤄질 것이다. 그 와중에 용혜인 의원만 용감한 진보주의자로 남을 것이다. 이래서 '지금 당장'은 진보를 방해하는 주적이다.

참고자료
Roy F. Baumeister etc, The Need to Belong: Desire for Interpersonal Attachments as a Fundamental Human Motivation, the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Psychological Bulletin, Vol. 117, No. 3,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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