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기본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거나 생각해 보는 것이다. 부모 없는 어린아이가 낡은 옷을 입고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 모습을 보면, 어지간한 사람은 가슴이 무거워지거나 눈시울이 붉어질 것이다. 이렇게 상대의 고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동화되는 것이 '정서적 공감'이다. 애덤 스미스가 강조하는 '동감 sympathy'이 정서적 공감을 가리킨다.
청년 70만 명이 마땅한 이유 없이 일도 취업 준비도 하지 않았다는 뉴스를 들으면 어떤 사람은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요즘 청년이 처한 기회 불균등과 정신건강 위기를 떠올릴 것이다. 청년이 처한 조건들을 떠올리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추론을 거쳐서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을 '인지적 공감'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공감은 주로 정서적 공감을 가리킨다. 정서적 공감은 신속하다. 공포처럼 추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타나는 감정 반응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사람마다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대상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괴물 부모는 내 자녀의 굴욕감에 민감하게 공감하면서도 남의 자녀의 억울함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인지적 공감은 조금 느리다. 추론 과정이라서 전제로 삼을 지식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사회규범을 익히면서 삶의 목표도 주입받을 수 있다는 사실, 목표가 높은데 달성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고 여길 때 무기력감을 느낀다는 사실, 그런 무기력감을 의지와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매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드러누워 버린 70만 청년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
흔한 사회비평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곳이다. 적지 않은 사람이 전장연의 처절한 외침보다 비장애인의 사소한 불편함에 더 주목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 남게 된 사연보다 출입국 관리법 규정에 더 신경 쓴다. 특수학교가 필요하다는 장애인 부모들의 호소보다 내 집값, 내 자녀의 안전한 통학에만 초점을 둔다. 주로 감정이나 따뜻함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흔한 비평이 말하는 공감도 정서적 공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타고 난다.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공감 능력이 매우 부족한 사람은 극히 일부다. 물론 경제적 불안이나 유대감 상실 등 심각한 사건 탓에 마음의 문이 닫혀버린 사람도 많겠지만, 그런 사람에게 정서적 공감 부족을 지적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울장애 환자에게 노력 부족을 지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오히려 과도한 정서적 공감이 약자를 소외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서적 공감은 시야가 좁다. 언제나 소중한 소수만 지켜본다. 누구도 오른쪽에 시선을 집중한 채로 왼쪽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한 쪽에 공감하기 시작하면 다른 쪽에는 냉담하게 된다. 그래서 내 가족의 상처에 과하게 공감하면 다른 가족의 처지를 외면하게 되고, 내 민족의 굴욕에 과하게 공감하면 다른 민족을 인간 이하로 보게 될 수 있다.
아이 둘을 키우느라 하루하루가 벅찬 직장인은 자녀에게 정서적으로 깊이 공감하는 상태일 수 있다. 그렇게 한 쪽에 공감이 쏠린 상태에서는 약자의 처절함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애초에 모든 사람은 부족주의자이고, 마음 속 부족 구성원에게 주로 공감하기 마련이다. 그 부족 구성원은 대체로 친족이거나 연인, 친구다. 넓게 봐야 민족이다. 인류나 계급처럼 너무 큰 집단에 깊히 공감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약자의 처절함에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소중한 소수에게 공감하는 중일 수도 있다.
약자에게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사람도 부족주의자처럼 행동하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전장연의 지하철 점거는 분노를 자극할 만한 일이다. 엄연히 위법한 일이고, 권력을 쥔 사람들이 아니라 또 다른 약자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위가 과격할수록 사회적 신뢰가 약해진다는 연구도 있고, 해외의 대중교통 점거 시위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장연에게 깊히 공감하는 사람은 전장연의 요구와 행동이 과연 합리적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약자에게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곧바로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정서적 공감이 과해서 문제를 겪는지도 모른다. 그저 서로 공감하는 대상이 다른 것 뿐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 부족한 것은 정서적 공감이 아니라 인지적 공감이다. 인지적 공감은 능력주의적이다. 사회문제나 심리학 등 사람에 대한 공부량이 많을수록 인지적으로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울장애가 노력의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우울장애 환자에게 인지적으로 공감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일상은 반지성주의에 물들고 있다. 많은 사람이 통계나 전문가의 분석이 아니라 유튜버의 거친 표현을 더 선호한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인지적 공감의 적이다. 추론의 전제로 삼을 만한 단서들이 뒤틀린다면, 바른 결론이 나올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타인에게 차가운 것은 일상에 치였거나, 이미 다른 대상에게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있거나, 인지적 공감에 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다.
'공감 부족'은 복잡한 문제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진단이다. 어떤 공감인지도 중요하고, 공감의 적절함도 중요하다. 애초에 정서적이든 인지적이든 공감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리라는 법은 없다. 상대를 위한 행동과 상대에게 실제로 도움되는 행동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 전반의 관점에서 보면, 철저히 계산적으로 손익을 분석해야 정의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공감 유행은 그다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참고자료
1.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이은진 역, 시공사, 2019.
2. 장대익, 공감의 반경, 바다출판사, 2022.
3. 김강민 외, 시위 집회가 사회적 신뢰에 미치는 영향, 한국지방행정학보 제20권 제2호,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