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즈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1900년대 즈음, 영국 자유당의 이념은 자유 무역과 작은 정부를 옹호하는 글래드스턴 자유주의에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로 변하고 있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은 자유당 안팎의 정치인과 지식인에게 정부가 포괄적으로 경제를 지휘하며 효율적으로 물건을 공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가르쳐줬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 자유당은 재건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공적 투자를 조직할 방안을 마련했다. 그 결과물이 1928년에 발간된 '영국의 산업적 미래 - 자유당 산업 조사 보고서', 약칭 BIF에 담겨 있다. 이 BIF 보고서에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 뿐만 아니라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결정적으로 관여했다.
BIF 보고서에서 눈 여겨 볼 만한 지점은 중요한 산업을 국유화하는 방식이다. 보고서는 당시 많은 기업이 주주로부터 사실상 통제받지 않는 전문 이사회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사회를 잘 조직할 수 있다면, 흩어진 주주들이 소유한 대기업과 국가가 소유한 공기업은 효율성 면에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자유당과 케인즈는 재산권의 폐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재산권은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필요한 덕목이었다. 다만, 재산권이 공공이익과 사회정의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가 다수의 삶에 매우 중요한 산업을 국유화하고, 독점 대기업을 감독하고, 민간 주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기업에 개입해야 한다고 여겼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정부가 사업체를 직접 경영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정 공무원은 산업 경영 능력을 잣대로 임명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산업 국유화는 주식회사와 유사한 공공 위원회를 만들어내야 했다. 즉, 자유당의 국유화는 소련이나 중국의 국유화와 크게 달랐다.
"정부 사업이 주식회사 형태와 유사한 형식으로 운영되도록 요구하는 데에는 중요한 논거들이 있으며, 이 경우 자본은 국가가 소유하고 이사는 국가가 임명한다." - BIF, 76p.
"우리는 장관들이 상업적 운영과 노동 고용에 대해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직접 책임져야 하며, 이러한 운영의 재정적 측면은 가능한 한 최대한 국가 예산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국가 부처들은 사업 행정을 위해 조직되어 있지 않다. 또한 장관들은 사업 능력으로 선출되지 않는다." - BIF, 76p.
"우리는 단지 민간 주주가 없고 전적으로 공익을 위해 기능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위원회가, 주주들의 실질적이거나 효과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급여를 받는 이사들과 임원들에 의해 관리되는 대규모 주식회사들의 이사회보다 덜 효율적이어야 할 어떠한 내재적인 이유도 보지 못한다." - BIF, 77p.
후배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역시 국유기업이 민간기업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기업의 상대적인 효율성을 측정하며 비교우위를 확인할 수 있는 환경, 다시 말해 경쟁적인 환경 속에 있다면,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공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유인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적절한 유인 구조를 설계하거나 작동시킬 유인도 없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 나는 이 주장 역시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경쟁의 존재여부이다."
- 조지프 스티글리츠, 시장으로 가는 길, 강신욱 옮김, 한올 아카데미, 2003, 136p.
이 보고서는 케인즈가 구상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흔히 케인즈가 자본주의를 경제 공황과 사회주의로부터 구하기 위해 고심했다고 가르치지만, 사실 케인즈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공공이익과 사회정의에 봉사하는 새로운 경제질서로 대체하려 했다. 그 핵심은 투자의 대부분을 담당하며 장기적으로 금리 불로소득자를 안락사시킬, 효율적인 공공기관이었다.
"케인스의 경제 정책 의제는 정부 주도의 사회주의 경제의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변형을 창조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 정부 계획 시스템은 대부분의 제조업 및 서비스 부문 기업을 포함하지 않았다. 과점적이지 않은 산업에 속한 기업들은 이전처럼 시장 경제에서 운영되도록 남겨졌다.
이 시스템은 소련이나 노동당 선언문에서처럼 모든 생산 자산의 국가 소유를 포함하지 않았다. 대신, 국가의 대규모 자본 스톡의 대부분을 통제하는 대규모 공공 소유 및 국가 영향 하의 기업(주택 건설 등)에 의존했다. 또한 과도한 시장 지배력을 가진 기업에 대한 국가의 지도를 포함했다.
케인스의 새로운 정책 체제의 중심은 '국가투자위원회'를 통한 '공공 및 반(半)공공' 기관에 의한 주요 자본 투자 프로젝트의 통제였다."
- James R. Crotty, Keynes Against Capitalism
사실, 이미 우리나라는 자유당과 케인즈의 구상을 어느정도 실현하고 있다. 국민연금기금은 국가가 소유하지만,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는 투자 기관이다. 안전한 투자를 강요받는 조건 속에서도, 국민연금기금은 압도적인 자본력과 전문성으로 어느 민간 보험사보다 뛰어난 실적을 거두고 있다.
IBK 기업은행 역시 국책은행이지만 민간은행 못지 않은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KB 국민은행 역시 한 때는 국책은행이었다.) 국민연금과 기업은행의 공통점은 국가의 소유물이라는 것, 그러나 법적으로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받는 이사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사진이 다른 기업들과 실적을 비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방식으로 더 많은 자본을 공공의 손에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공공 투자 기관은 토지를, 다른 공공 투자 기관은 금융을 맡아서, 민간 소유주가 사유화하는 지대를 대신 창출하고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민간 기업에 더 많은 자유와 투자를 보장하며 '국민의 기본적 수요를 먼저 충족하는' 경제정의를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생활의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인간다운 생활의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정의의 원칙에 적합하여야 한다.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 바이마르 헌법 제151조, 경제생활의 기본원칙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 대한민국헌법 제1호, 제84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