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한 진보주의 10화
냉전 이후 진보주의는 너무 많은 사람을 배제하고 있다. 마치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키오스크 같다.
원래 진보주의는 돈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재산 수준에 따라 교육받을 기회와 법적 보호까지 불공정하게 분배되는 상황이야말로 진보주의의 주적이었다. 특히 불로소득에 대한 분노야말로 다양한 진보주의를 관통하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냉전 이후 진보주의는 돈 문제를 넘어 무수히 많은 문제를 다룬다. 소수 민족과 종교, 동성애자와 트렌스젠더, 심지어 동물까지, 사회적 주류가 아닌 정체성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이런 운동은 지금까지 감춰진 문제를 들춰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진보주의자들이 문제를 들춰내고 새로운 사회계약을 제안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는 자기들끼리 합의한 사회정의를 유일한 정답으로 정해두고, 그 정답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비난하고, 캔슬하고, 처벌하기 시작했다.
이는 낯선 것에 익숙해질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그저 험한 세상에서 살다보니 기존의 것을 뇌 깊숙한 곳에서 체화했을 뿐인 사람들에게 상당한 공포를 심어줬다. 새로운 권력이 나타나서 평온한 일상을 해치려 한다는 인식을 퍼뜨렸다. 이것이 역차별 서사의 뿌리 중 하나다.
사람은 복잡한 세상을 단순한 범주로 나누면서 '편견'을 만들어야 살 수 있는 동물이다. 같은 원리로, 어지럽게 굴러가는 세상에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규칙적인 행동 프로그램, 즉 '습관'을 만들어야 살 수 있는 동물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예측 가능한 영역을 넓히며 살아 왔다. 통계를 만드는 마음과 사람을 집단으로 분류하고 그 집단의 특성을 일반화하는 마음은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안타깝게도, 사람 마음은 규칙을 찾고 몸에 익히는 데 탁월하지만 새로운 규칙을 익히는 데는 그렇지 않다. 한 번 규칙적인 지식을 발견하고 오랜시간 몸에 익히면, 그 규칙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중독 또는 의존증은 치료하기 매우 힘든 문제다.
특히, 생존을 걱정하며 하루하루 과로하는 사람은 더더욱 기존 규칙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뇌가 규칙을 찾고 익히는 이유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다. 사람이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어느정도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온종일 피로를 느끼는 사람, 빈곤감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는 심리학적 사실이다. 누구나 마음을 챙기기만 하면 손쉽게 습관이든 뭐든 바꿀 수 있다는 비과학적 자기계발론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오랜시간 체화한 것을 바꾸기 어렵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삶의 의미가 모호해지고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그런 고통을 나눌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는 시대다. 그런 시대에 인지적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줄지 않는 정신질환은 그 증거 중 하나다.
지금 보수를 지지하거나 진보주의에 무관심한 사람들 상당수는 과잉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 왔다. 사회생활에 뛰어들면서 술과 담배를 배우듯, 살아남는 과정에서 기존 상식을 체화했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는 상대적 빈곤감과 만성적 피로감 탓에 인지 능력 과부화에 빠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했을까. 진보주의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모조리 차별주의자, 혐오주의자로 내몰고 있다. 평생 열심히 산 사람들이 난해한 진보주의 앞에서 쩔쩔매다가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고 주눅들고 있다.
사람 양심은 복잡하고 새로운 질서를 내장하고 있지 않다. 그랬으면 법조인이라는 직업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문화는 수많은 소수자 정체성을 분별하고, 그 정체성을 존중해서 사회적 비난을 피하는 법을 하나 하나 익힐 것을 요구하고 있다. 명확하게 합의되었고 누구나 읽기 쉬운 지침서도 없이.
그 결과, 진작 진보 사상을 체화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 무슨 이유로 사회적 비난을 받을지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이제는 법적으로 손해배상까지 감당해야 한다. 가뜩이나 예측가능한 영역이 줄고 있는데, 진보주의자들은 인지적 여유를 되찾아주지는 못하면서 예측하기 힘든 문제만 떠넘기고 있다.
진보주의자란, 젊을 때부터 새로운 문화를 체화했을 뿐인 사람들, 도덕 감각이 개방적이어서 새로운 것을 부담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사람들, 복잡하고 난해한 현대 진보 사상과 새로운 사회과학을 배울 기회를 누렸을 뿐인 사람들일 뿐이다. 특별히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 더 많이 기여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 진보주의는 그런 운 좋은 사람만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어떤 이유로든 인지 능력에 여유가 부족한 사람은 소수자 정체성 목록을 끝없이 늘려가는 현대 진보주의를 따라갈 수 없다. 여기에 법적인 손해배상이나 처벌까지 더해진다면, 적지 않은 사람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숨어버리거나 진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게 될 것이다.
진보적 사회과학에서, 진보주의로부터 배제된 사람 상당수는 사회의 주류, 상대적 강자로 분류될 것이다. 선진국 국민이거나, 남성이거나, 비장애인이거나, 이성애자일 테니까.
하지만 더 나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발언권이 없다면, 한국의 여성과 장애인, 성소수자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아프리카와 남미 빈국의 약자에 비하면 굉장한 권리와 부를 누리고 있으니까. 누가 더 약자인가를 두고 다투면 한도 끝도 없다.
많은 사람이 빈곤과 기회 불균등 속에서 과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온갖 낯선 것을 들이붓는 것은 모순이다. 현대 진보주의는 복잡한 키오스크처럼 기존 상식에만 익숙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지만, 정작 진보주의자들은 그런 자각이 없다.
현대 진보주의는 실제 인간이 아니라 공상 속 민중 또는 소수 운 좋은 자를 위해서만 봉사하고 있다. 정말 옳다고 단정하기 어려운데다가 곧바로 이해하기 힘든 사회정의를 '지금 당장' 구현하려 하고 있다. 극우의 준동은 자본의 음모가 아니라 비인간적 진보가 초래한 반동이다.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술이나 담배를 끊을 때 느끼는 마음 속 관성과 같다.
가장 오래된 사회주의는 사람과 사회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기반으로 최대 다수에게 이로운 사회질서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을 이해하지 않는 진보주의는 사회주의적이지 않다. 이것이 내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 하면서 현대 진보주의를 자주 공격하는 이유다.
진보는 다시 진보 다워져야 한다. 그 시작은 경제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선 과잉 경쟁과 생존 불안을 진정시키고 서로를 동료로 여길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다음, 그 이후 비로소 새로운 권리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진보주의'를 되찾아야 한다.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크게 다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