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영역에서 좌파지만 문화 영역에서 보수인 사람들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확산하자,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저항하기보다 웅크리기를 선택했다. 증세를 멈추거나 감세에 동참했고, 국유 기간산업을 민영화했고, 지역 인프라 개선과 복지제도 확장을 머뭇거렸다.
세계화의 여파로, 노동자는 세계화로부터 혜택 입은 고숙련자와 그러지 못한 저숙련자로 분열되었다. 덴마크 같은 소수 사례를 제외하면,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웅크리기는 저숙련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했다.
그런 와중에 이민, 난민 위기가 일어났다. 가난한 동유럽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북 - 서유럽으로 이민했고, 북아프리아와 중동의 난민이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바다와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몰려들었다.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평등과 인류애를 앞세워서 이민자와 난민을 적극 수용했다. 전통적으로 사회민주주의자는 자국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민을 조절해 왔음에도, 세계화에 적응한 후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른 길을 골랐다.
물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민자와 난민에게 적절한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할 계획을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국민의 복지 예산도 억제하고 완전고용도 사실상 보류한 상태였다. 자연히 이민자와 난민에게 많은 것을 지원할 여력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영국 등에서는 행정의 공백을 시민단체와 지역사회가 메워야 했다.
저개발 지역의 저숙련 노동자들은 자신이 사는 곳과 일하는 곳에 애착을 느꼈지만, 금융과 정보, 신재생에너지 등 새로운 산업 탓에 공장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 봐야 했다. 또한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이 복지 혜택을 받을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고집하려는 모습도 지켜 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분노를, 좌파 지식인은 인종차별주의, 새로운 파시즘이라며 외면했다. 지역에 대한 애착과 경제적 불안감이 이방인을 경계하게 만든 주 원인이었음에도, 좌파 지식인은 이민자에 대한 편견과 난민에 대한 가짜정보만 단속하면 노동자들도 진정할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물론 좌파 지식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민자와 난민이 반드시 임금을 낮추고 범죄율을 높인다고 할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이런 통계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은 초점을 잘못 잡은 것이다. 우선 직관적으로 봤을 때, 이민자와 난민의 범죄는 그들을 받지 않으면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분노를 사기 쉬웠다.
또한 이민 개방이 정말 경제적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그 번영의 혜택이 몰락해가는 지역의 저숙련 노동자에게도 분배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낙수 효과를 믿는 게 아니라면, 이민 개방을 통한 경제성장과 세수 증가가 자동으로 모두에게 충분한 이득이 된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특정 조건에서는 값싼 이민자가 자국민의 임금을 억제하거나 임대료를 올린다는 관찰도 있다.
무엇보다, 문제의 핵심은 애착을 느끼는 지역과 일자리가 몰락해간다는 허탈함, 익숙한 것이 하나씩 사라진다는 공허함, 앞으로 삶을 개선하는 커녕 지금 위치도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는 불안감이었다. 실제로 외국인 비율이 비슷하더라도 실업률이 더 높은 곳에서 상호 신뢰가 낮아졌다는 연구도 있다.
경제 문제는 어렵다. 차분하고 계산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문화 정체성은 쉽다. 침해당하면 즉시 감정적인 반응이 일어난다. 이런 이유로, 경제적으로 좌파지만 문화적으로 보수인 사람들은 문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경제적 이익을 포기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유럽의 좌파 지식인은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그런 무관심의 결과로, 유럽 곳곳에서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에 충성하는 동시에 익숙한 것에 애착을 갖는, 일명 '보수좌파' 노동자들이 우파 정당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특히 국경을 다시 강화하고 익숙한 문화를 지키자고 주장하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노동자층이 재분배를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스웨덴 민주당 등 일부 우파 포퓰리즘 정당은 '복지 쇼비니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복지국가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되, 자국민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파 포퓰리즘 정당은 독일과 스웨덴, 프랑스에서 원내 제2당으로 올라섰고, 이탈리아, 헝가리, 네덜란드에서는 집권에 성공했다. 이변이 없다면, 2029년 영국에서도 우파 포퓰리즘 내각이 들어설 수도 있다.
우리나라 좌파 정당이 힘을 잃어가는 것도 비슷한 이유 탓이지 않을까. 이미 외국인 비중이 높은 지역에서는 진보당도, 민주당도, 국민의힘도 이주노동자 쿼터 조정, 자국민 고용 촉진을 공약하고 있다. 일부 노동조합은 외국인 고용 확대에 적극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정의당 등 대부분의 좌파 정당은 이런 문제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공존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하면서 그저 차별과 혐오가 문제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다. 우리만 참으면 다 해결된다는 식이다. 지난 총선에서 전체 노동조합 가입자 수보다 적은 표를 받고 원외로 내쫓겼으면서도, 아무도 원인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미 우리나라는 우경화되고 있다. 곳곳에서 외국인, 특히 중국인을 향해 분노를 드러내는 사람이 자주 보인다. 지난 20여 년 동안 가난의 원인으로 환경을 지목하는 사람도 크게 줄었다. 수많은 청년과 직장인이 부동산과 주식, 가상화폐에 투자하며, 노동자보다는 투자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마거릿 대처도 이루지 못한 '대중 자본주의'를, 우리나라가 이념적으로나마 이뤄냈다.
많은 사람이 같은 곳에서 함께 일한다는 의식을 갖는 대신, 어떻게든 대박을 터뜨려서 갑갑한 조직 생활에서 벗어날 방법만 찾고 있다. 상호책임은 감춰지고, 각자도생이 확산하고 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지역이 외국인 노동자와 자국민 실업자만 남거나 소멸하기 직전인 상황에 처하고 있다. 유럽에서 우파 포퓰리즘에 영양분을 준 사회적 조건이 우리나라에도 재현되고 있다.
훗날 우리나라에서도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활개친다면, 문제를 일으키거나 방조한 기성 진보좌파의 책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자처럼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을 모두 받아줄 수 없다. (...) 너무 많은 사람들 들여보낸 사회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 사회민주당 소속
주요 참고자료
Debus, M., & Traunmüller, R. (2025). Former Social Democratic Partisanship, Working-Class Background, and Support for Right-Wing Populist Parties: A Research Note. Politische Vierteljahresschrift.
Breckwoldt, J. (2025). Who cares about the culture war? Evidence from a vote choice conjoint experiment. Electoral Studies.
Bonomi, G., Gennaioli, N., & Tabellini, G. (2021). Identity, Beliefs, and Political Conflict.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Dinsmore, A. (2025). Redistribution vs. recognition: How Brexit split the left. International Journal of Politics, Culture, and Society.
In an Age of Right-Wing Populism, Why Are Denmark’s Liberals Winning?, The New York Times, 2025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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