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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Feb 04. 2023

사회적 피라미드에 짓눌리지 않는 법.

저는 '선생님'과 '선생'을 다른 의미로 씁니다. 교수님이나 박사님, 작가님처럼 특성 있는 존칭으로 부를 수 없지만 저보다 학식이 깊고 연령이 높으신 분을, 저는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선생님보다 한층 더 높은 호칭이 바로 선생입니다. 적어도 제 안에서는 그렇습니다. 제가 감히 올려다 보기도 힘들 정도로 위대한 분을, 저는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으로 동아시아 최고의 혁명가인 '손중산 선생', 윤리와 정치사상의 대가인 '밀 선생', '생시몽 선생'이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선생님이나 선생이나 같은 말이지만, 저는 둘의 어감이 조금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선생님'은 그저 옆을 지나갈 뿐인 사람에게도 쓸 수 있는 호칭입니다. 과거에는 아무에게나 쓸 수 없는 극존칭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흔하게 사용되는 바람에 장관님이나 교수님 같은 존칭보다는 격이 조금 낮아 졌습니다.

원래 '선생'이라는 한자어는 호칭을 존칭으로 바꿔주는 우리말인 '님' 자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그 자체로 존칭인 단어입니다. 어떤 호칭이든 님이 붙어야 존칭이 되는 우리나라에서, 누군가를 그냥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의 없는 행동이지만, 간혹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죽은 위인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누구누구 선생께서는'이라며 운을 떼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한자 문화권에서는 '님'처럼 호칭을 존칭으로 만들어 주는 단어가 잘 사용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인은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타나카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선생 자체가 존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님'과 유사한 존칭인 일본어 '사마'는 사무라이나 황족처럼 확연히 계급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주로 쓰이는 편입니다. 레이와 천황의 장녀, 아이코 내친왕(공주)을 '아이코 사마'라고 부르는 식입니다.

중국인도 그 자체로 존칭인 단어를 주로 사용하지, 어떤 단어를 존칭으로 만들어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시진핑을 가리킬 때에도, 그 자체로 최고 권위를 가진 존칭인 '주석'이라고 부릅니다. 애초에, 중국어에 우리말 '님'처럼 호칭을 존칭으로 바꿔주는 단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영어 단어가 그 자체로 격을 갖는 것처럼, 중국어 단어도 그 자체로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존칭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동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동지는 상대가 누구이든, 상대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편하게 부르는 수 있는 수평적인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불평등한 소득 수준과 권력을 갖고 있더라도, 인격 만큼은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동등한 인격을 존중받는다면, 우리 모두는 회사에서 직장 상사에게 떨지 않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대학교에서 교수님과 근거와 논리로 토론할 수 있게 됩니다. 인격의 평등은 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회를 지탱하는 철근이고, '동지' 같은 수평적인 호칭은 상대방의 인격을 동등하게 존중한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겉으로만 평등한 공산권에서는 '동지'라는 호칭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박사님 같은 존칭은 사람 사이에 뚜렷한 위계 질서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상대가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니까 쓸 수 있는, 굉장히 보수적인 호칭입니다. 이런 존칭에 너무 익숙하다는 점은 우리가 일상 속 깊숙히 권위주의에 찌들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 순간 누가 나보다 높고 낮은지 파악하는 일이 '사회생활의 기본'입니다. 하나 하나 존칭을 쓰는 일은 그런 권위적인 사회생활에 순응한다는 걸 보여주는 항복 깃발인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현실의 벽이 높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권위적인 우리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존칭이라는 백기를 흔들어야 합니다. 제가 상대와 평등해지고 싶다고 해서, 상대도 저를 평등하게 대해 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재용 회장이 사내 호칭을 바꾸라고 명령해도 직원들 간의 권위 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우리나라인 만큼, '수평한 관계'는 너무 동떨어진 이상입니다.

대신, 저는 누구를 어떻게 더 높여 부를 것인지를 스스로 고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써야 하는 존칭 용법을 따르되, 기존 존칭 중에서 제가 정말 높여서 부르고 싶은 사람을 부를 때 쓰는 존칭을 따로 정한 겁니다. '외왕내제'처럼, 밖에서 쓰는 존칭과 안에서 쓰는 존칭을 구분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제가 '선생님'과 '선생'을 구분하는 이유는 당장 바꾸기 힘든 현실 속에서 자기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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