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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May 18. 2023

문재인 혐오를 잠시 멈춰야 할 이유.

말씀드리지만, 저는 단 한 번도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한 적 없습니다.

우리는 문재인 시대의 좋은 면도 직시해야 합니다. 지난 정부의 긍정적인 면을 찾는 일은 정신건강에 도움될 뿐만 아니라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게 해줍니다. 다음 시대를 사는 우리는 과거의 영광과 폐허에 한 쪽 씩 발을 대고 서있습니다. 한 쪽을 무너뜨린다면 우리는 중심을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재인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크게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문재인 대통령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징집병을 박대해 왔습니다. 2년 넘는 시간 동안 병역의 의무를 청년에게 짊어지게 하고는, 최저임금과 퇴직금을 지급해 주지는 못할 망정 트라우마와 박탈감을 떠안겼습니다. 그나마도 건강하게 집에 돌아가지 못한 병력도 매년 연대 하나 규모로 나왔습니다. 2020년에 더불어민주당의 황희 의원이 병무청에 요구한 자료를 보면, 건강하게 제대하지 못한 병사가 6년 동안 9900명이 넘습니다. 일반 백성이 병장기를 스스로 마련하거나 비싼 국방세를 감당해야 했던 조선의 군역제도처럼, 우리나라 징병제는 명백히 반사회적인 수탈이었습니다. 이런 징집병의 처우를 극적으로 개선시킨 것이 문재인 대통령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복무기간을 줄이고, 병사 월급을 정상화하고, 휴대폰까지 지급했습니다. 문재인 시대가 되어서야, 대한민국 국군은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부합하는 군대가 되는 첫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병사 복지만 챙긴 것은 아닙니다. 전투력도 강화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할 동안, 우리나라 국방비는 6% 이상 늘었습니다. 이는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집권기보다 높은 수치여서, 참여연대가 비판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사일 사거리 제한도 해제했습니다. 1960년대, 미국은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미사일 개발을 억제하려 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평양보다 북쪽을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만들지 않기로 미국과 약속했습니다. 이 외교 약속을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라고 부릅니다. 지침은 1991년 노태우 정부 때 한 번 더 강화되었다가, 1999년 김대중 정부 때 조금 완화되었습니다. 2012년과 2017년에 크게 완화되었다가, 2021년 5월에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서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같은 해 9월, 지침 폐지를 자축하듯 우리나라는 SLBM 수중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 정책에 실패했는지 몰라도, 국방에 소홀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근로장려금을 의미 있는 재분배 제도로 개선했습니다. 2019년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단독 가구의 경우 만 30세 이상인 사람에게 근로장려금으로 최대 85만 원을 지급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단독 가구의 나이 제한을 풀고, 최대 지급 금액을 165만 원으로 높였습니다. 효력은 2019년부터 나타났습니다. 원래 근로장려금은 비용과 재분배 효과 면에서 우수한 제도이지만, 우리나라 근로장려금 제도는 제 기능을 다하기에 미약했습니다. 2018년 기준으로 근로장려금을 받은 가구는 273만에 불과했고, 근로장려금 예산도 1조 3천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2019년부터 근로장려금을 받는 가구는 500만 가구에 달하게 되었고, 예산도 4조 5천억 원을 넘겼습니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근로장려금과 박자를 맞춰서 점진적으로 최저임금을 올렸더라면, 소득주도성장론이 완전히 사장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큰 성과는 정부 규모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맹목적인 작은 정부론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줬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근거 없는 작은 정부론에 발목 잡혀서 사회문제를 외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부가 일을 하려면 예산이 필요한데, 우리나라 정부가 다루는 예산은 주요국 사이에서 가장 작은 편이었습니다. 2003년에 우리나라 정부 예산은 160조 원 정도였고, 2012년에는 320조 원 정도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 지출을 극적으로 확대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4년차인 2020년, 정부 예산이 500조를 넘어섰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전에 책정된 본예산이 500조였습니다. 코로나가 한창 퍼져나가던 2021년에는 기어코 600조를 돌파했습니다. 그럼에도 2020년과 21년에 문재인 대통령의 최고 지지율은 60%를 웃돌았습니다. 이를 보면,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기는 우리나라 국민이 큰 정부를 향한 근거 없는 두려움을 조금 내려놓은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성과는 실책을 다 덮을 수 없습니다. 문재인 시대에 우리나라는 귀중한 시간을 흘려버렸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태우 - 김영삼 대통령이 부럽지 않게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본인도 국민적으로 지지받고 있었고, 민주당은 정권 시작부터 원내 제1당이었습니다. 정권 중반에는 비례정당과 함께 180석을 차지했습니다. 참여연대 같은 규모 있은 시민단체와 유시민 장관 같은 영향력 있는 유명인이 대통령을 위해 여론전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골든타임을 놓쳤습니다. 불공정과 저출산, 청년 고독사 문제에 적절히 개입하지 않았고, 그 위에 남녀갈등, 한일관계, 대북관계, 공기업 적자 등 새로운 과제를 얹졌습니다. 문재인 시대는 여러 의미로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 대통령이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포스트 문재인 시대를 살고 있고, 문재인 시대가 남긴 실패 뿐만 아니라 성과도 물려받았습니다. 과거의 유산을 상속받으려는 사람은 채무도 함께 넘겨받아야 합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만든 광케이블을 이용하면서 전두환 시대를 통채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군부를 숙청한 덕에 민주주의를 누리면서 IMF 사태만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 문재인이 남긴 것을 모두 직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침착하게 과거에서 무엇을 배울지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임 대통령의 좋은 점을 되새겨 보는 일은 나와 나라를 위한 일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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