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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Jun 02. 2023

우리가 마시일을 걱정할 때 그들은 없었다.

비무장 평화주의의 폐해.

장수국가 일본에서는 정당도 장수한다. 일본 공산당은 1922년 7월에 창당되어서 올해로 101주년을 맞았다. 같은 해 7월에 김수환 추기경이 태어났고, 11월에 오스만 제국이 공식 해체되었다. 일본에서 공산당보다 먼저 창당된 정당은 여럿있지만, 지금까지 해산되지 않고 조직을 지킨 것은 공산당뿐이다.

일본 공산당은 101년 동안 집권해 본 적 없다. 당세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불법 지하조직에 불과했지만, 이후에는 합법화되어서 이탈리아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자유세계에서 가장 강한 공산주의 정당이 되었다. 지금도 교토 등 일부 지역에서는 자유민주당, 공명당 등 주요 정당과 대등하게 다투고 있다. 하지만 일본 국회에서 공산당은 만년 제4당이었다. 최근에는 일본유신회가 급성장한 탓에, 제4당 지위도 위태롭다.

문제는 '안보 불감증'이었다. 일본 공산당은 평화헌법을 지키는 호헌 야당 중에서도 가장 강경하다. 중국과 북한의 행패를 비판하면서도, 방위비 인상을 군국주의라고 매도했다. 심지어 자위대를 해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주일 미군 철수는 덤이다. 북한이 일본 영공 위로 미사일을 발사하고, 중국이 해군력을 키워서 일본 영해를 노리는 와중에도, 공산당은 '평화국가', '비무장 평화주의' 노선을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비무장 평화주의가 왜 문제일까. 배신이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마크 모펫에 따르면, '사회'란 정체성과 소속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소속감을 느끼는 가장 큰 사회는 '국민국가'다. 우리는 가족 이상으로 국민국가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속한 국민국가의 영토나 이익, 상징이 공격받을 때, 우리는 내 가족이 공격받은 것처럼 분노한다. 이탈리아인이 오랫동안 안정환 선수를 미워한 것도, 욱일기를 단 일본 군함을 맹목적으로 혐오하는 것도 같은 마음이다. 그런데 비무장 평화주의자는 이런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다. 양아치가 동생을 위협하는데 형이라는 사람이 옆에서 대화만 시도하고 있다면, 동생의 기분이 어떨까? 안전은 모든 생물의 기본 가치이고, 비무장 평화주의는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실제로 집단의 안보에 둔감한 좌파 정당은 대체로 실패해 왔다. 이민,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온 스웨덴은 심각한 안보 위기를 겪고 있었지만,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국경 개방을 고집했다. 그 탓에 스웨덴에서는 극우 정당이 급격히 성장했다. 최근 총선에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그룹은 우파 그룹에게 정권을 내줬다. 우파 그룹에서 승리의 주역은 다름 아닌 반이민 - 반난민 극우 정당인 스웨덴 민주당이었다. 군소정당에 불과했던 스웨덴 민주당은 이제 원내 제2당이다.

영국 노동당도 비슷한 실패를 겪었다. 청년당원과 극좌파에게 지지받은 제레미 코빈은 신드롬을 일으켰다. 코빈은 제3의 길 노선을 폐기하고, 보다 강경한 사회주의 노선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코빈 신드롬은 오래가지 않았다. 코빈은 브렉시트 문제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줬고, 핵무기 해체나 군축을 요구했다. 영국은 그다지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고, 많은 국민이 강한 영국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지만, 코빈은 이상적인 평화주의 노선만 고집했다. 결국 코빈의 노동당은 총선에서 대패했고, 코빈 본인은 반유대주의 혐의 탓에 당권을 잃었다.

성공적인 좌파 정당은 안보를 무시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덴마크 사회민주당이다. 1990년대 유럽에서 이민, 난민이 급격히 늘어날 때, 덴마크 사회민주당은 신중하게 대응했다. 이웃 스웨덴과 다르게 사회적 혼란을 고려해서 국경을 조절했다. 당시 스웨덴은 덴마크를 비난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덴마크 사회민주당은 원내 제1당 자리를 되찾고 장기 집권 중이지만,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극우 정당의 공세에 밀려서 정권을 잃었다. 새 당수를 선출한 영국 노동당도 역대 가장 높은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 키어 스타머 당수는 '진보적 애국주의' 노선을 채택하며 영국의 안보를 외면하지 않았다. 보수당의 실책 덕도 있지만, 스타머 당수의 명료한 안보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노동당이 다시 애국 정당이 된다면, 노동당은 자랑스럽게 국기 옆에 설 수 있을 것이다."
- 키어 스타머 경, 영국 노동당 당수

일본인은 집단주의의 표본으로 통한다. 국민국가 일본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동질한 문화를 고집하고 있다. 그런 일본인에게 안보 문제는 가장 중요한 가치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안보에 강경한 자유민주당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폭넓게 지지받고 있다. 반면 일본 야권은 환상 같은 평화헌법 수호와 비무장 평화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 공산당은 가장 고집쟁이다. 그 결과는 의석 격차가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좌파도 일본 공산당과 비슷한 처지다. 우리나라 좌파도 비무장 평화주의 노선을 고집하고 있다.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국방비를 대폭 늘릴 때, 우리나라 좌파는 군국주의 예산을 편성했다며 두 대통령을 비난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에도, 우리나라 좌파는 북한을 비난하는 척하거나 아예 침묵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좌파는 단 한 번도 정치의 중심에 서보지 못했다. 배신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조금만 다른 주장을 펴면 배제하기 바쁜 좌파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애국심 강한 우리나라에서, 비애국 좌파는 앞으로도 국회에 진입하는 일조차 어려울 것이다.

"용감한 크리옹, 네 목을 매달아라. 우리가 아르크에서 싸울 때 너는 그 자리에 없었다."
- 앙리 4세, 프랑스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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