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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May 30. 2023

머물러 있는 스물인 줄 알았는데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째선지 남은 건 서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서른이다. 심지어 다음달은 6월이다. 다다음 생일이 지나면 만 나이로도 얼버무릴 수 없게 된다. 이대남으로 묶이는 게 싫었지만, 막상 벗어나고 보니 허허벌판에 혼자 남겨진 것 같다. 잔고 없는 통장과 계획 없는 일상은 스물의 특권인가 보다. 여태 무엇을 했는지, 무엇이 남았는지 돌이켜 보다가 기분이 이 지경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열일곱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열아홉부터 집안일을 돕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일했다. 최저시급이 오천 원도 안 될 때였지만, 버는 돈의 60% 이상을 집에 가져다 줬다. 한 주에 서른여섯에서 마흔 시간을 일하고 나면,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십만 원 뿐이었다.


개인회생이 문제였다. 엄마 소득으로는 아빠가 남긴 신용카드 대금과 대출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엄마는 회사의 직원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개인회생 절차를 밟아야 했다. 월세에, 생활비에, 개인회생 변제금까지, 엄마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었다. 갓 중학교에 들어간 동생까지 자퇴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친척들에게 의존할 수도 없으니, 장남인 내가 나서야 했다. 5년 동안 개인회생 변제금을 납부해야 했고, 나는 엄마 소득이 안정될 때까지 4년 가까이 생활비를 보탰다.


개인회생을 신청하기로 했을 때 엄마에게 들었는데, 아빠는 매일 출근했지만 집에 돈을 잘 가져다 준 적이 없었다. 대신 신용카드를 쓰고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본인 신용에 한계가 오자, 엄마 신용을 끌어다 썼다. 그러다가 뇌출혈로 죽었다. 유산을 정리하면서 보니, 아빠가 남겨 놓은 재산은 삼만 원이었고 빚은 삼천만 원이었다. 당연히 상속을 거부했지만, 아빠가 망가뜨린 엄마 신용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내 마음은 빠르게 무너졌지만, 다시 세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얼마 안 되는 자유를 정신과에 지출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병원을 가야 할지도 몰랐고, 병원을 다닌다고 해서 뭔가 나아지리라고 믿지도 않았다. 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받는다는 발상이 안일하다고 여겼다. 다 자기 살기 바쁜데, 누구를 어떻게 믿고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는 게 존재한 적은 있던가. 삶의 쓸모도 모르고, 밤에 화장실에 갈 때조차 불안감을 느꼈지만,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수 없었다.


대신 책을 샀다. 월급이 들어오면 남은 돈을 죄다 서점에 보냈다.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깜깜한 미래를 밝혀 줄 촛불이 책에 있다고 넘겨짚었을 뿐이었다. 어차피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술을 잘 마시지도 않고, 여자친구도 여태 없었으니, 두세 명만 남기고 친구와 연락을 끊으면 돈 나갈 일이 없었다. 덕분에 한 달에 서너 권은 살 수 있었다.


책은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책에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법을 찾고, 내가 이렇게 된 이유를 찾고, 살아야 할 이유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법을 찾았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거 뿐이었다. 한동안 진전이 없었다. 책 중에는 사기꾼이 많았다. 학생이 이해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교수님도 있었다. 역사와 정치사상 지식은 쌓였지만, 마음을 진정시는 법과 살아야 할 이유는 얻지 못했다.


이렇게 일, 책, 일, 책을 반복하는 동안, 개인회생이 끝났다. 해방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십대부터 괴로움을 견뎠지만, 남은 건 통장 잔고 3천 원과 책 한 무더기였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을 채우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공적인 일에 봉사하겠다는 사명감은 없었다. 공무원은 학력도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노릴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었다. 그 뿐이었다. 마음은 몰라도 몸은 건강했으니, 엄마를 부양하기는 어려워도 나 하나 정도는 먹여 살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공부할 때 필요한 돈도 직접 모았다.


처지가 절박했는데, 공부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얼마 안 되는 취미도 포기하고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었다고 치자. 그 다음은 무엇인가. 매일 만원 버스를 타고 꽉 막힌 사무실에 들어가서, 말도 안 되는 민원을 처리하고 말이 안 통하는 직장상사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스트레스에 민감한데, 그런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고통스럽게 공부해서 얻은 결과가 고통스런 직장생활이라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원치 않게 일하며 살아 왔는데, 언제까지 그래야 한단 말인가. 생계보다 의미가 더 절박했다.


세번째 시험에 떨어진 해 겨울, 아는 형이 일자리를 소개해 줬다. 엄마 회사와 계약을 맺고 개인회생 절차를 지원해 준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알게 되었다. 새로 일하게 된 곳은 세무법인과 함께 운영되는 인터넷 강의 스타트업이었다. 세무법인은 형의 선배가, 스타트업은 형이 관리했다. 아무렴 상관 없었다. 최저시급이 잔뜩 오른 탓인지, 아르바이트로 일할 때보다 월급이 높았다. 언제 붙을지 모르는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느니, 그 시간에 돈이라도 벌자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속한 인터넷 강의 회사와 세무법인은 같은 사무실을 썼다. 그러다보니 세무법인 쪽 사정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세무업계는 생각보다 처참했다. 세무사가 도제식으로 직원을 가르치는데, 세금 신고 기간이 되면 직원은 막차 시간까지 일해야 했다. 주말에도 자주 출근했다. 그러고도 추가 수당을 못 받았다. 그저 세무사가 된다는 일념으로 과로했다. 혼자 다른 회사였던 나는 정시에 퇴근할 수 있었지만, 매번 남겨진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또 다른 가혹함을 엿 본 탓인지 일할 의욕이 사라졌다. 무엇 때문에 공무원 시험에 집중하지 못했는지 떠올랐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잊고 있었지만, 세상은 이런 곳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싫어졌다. 거의 매일 지각했지만, 어차피 집에서도 일하니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은 나를 불러서 잔소리를 했다. 요지는 이랬다. 누가 집에서도 일하라고 했나. 출퇴근 시간은 모두가 정한 약속인데, 너 혼자 특별히 대우받게 해달라는 거냐. 여기서부터는 내 이성이 견딜 수 없었다. 곧바로 받아쳤다. 그 이야기 고스란히 노동법에 적용해 보자. 노동법은 사회 전체가 정한 약속 아닌가. 그런데 당신과 당신 선배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느냐. 저 직원들 밤 늦게까지 일하고 야근수당도 못 받는데, 알고 있었나. 자기들은 특별하게 대우받으려 하면서,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


결국 5개월 만에 퇴사했다. 계약기간이 한 달 정도 남았지만, 스스로 나왔다. 더는 그런 광경을 볼 수 없었다. 후회는 없었다. 첫 월급으로 엄마에게 60만 원짜리 가방을 사줬다. 아빠가 쓰러질 때부터 우리집에 신경써 준 이모와 이모부 생일도 챙겼다. 매달 집에 생활비도 보탰다. 통장에는 80만 원이 남았지만, 3단짜리 책장 4개는 가득찼다.


다시 백수가 되었으니 진로를 정해야 했다. 어차피 내가 견딜 수 없다면 공무원도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싶었다. 어릴 때에는 만화가가 꿈이었다. 만화가가 되면 머릿속에만 있는 세상을 내 손으로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 밖에 몰랐던 부모 때문에 잊고 살았지만, 기회가 왔다. 콘텐츠 시장은 매년 성장하고 있으니, 내가 설 곳이 있을 것이다. 물론 통장에 남은 80만 원만으로 웹툰 작가가 될 때까지 버틸 수는 없을 테니, 먼저 돈을 모으자. 그림 실력은 없지만, 내게는 넘쳐나는 소재가 있다. 주변에 실제로 작가로 일해 본 친구도 있다. 가능하다.


그렇게 1년 동안 문구점에서 하루 11시간 반 동안 일했다. 돈만 보고 일을 골랐다. 처음 겪어보는 근로시간 탓인지, 마음이 또 다시 망가졌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날 괴롭힌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렇게 일하고 나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사각형도 그릴 줄 모르고, 친절한 교과서 같은 글밖에 쓸 줄 모르는 내가 웹툰 작가가 될 수 있나. 된다 한들, 지금보다 행복해 질 수 있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책에 매달렸다. 신경정신과에서 약도 받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더 많은, 더 좋은 책이 필요했다.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빼면 남은 돈은 200만 원 남짓. 교통비로 약 10만 원을 쓰고, 엄마에게 30만 원을 주면, 남은 돈은 160만 원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 중 100만 원을 저축했어야 했지만, 인터넷 서점을 거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나에게 남은 건 퇴직금 뿐이었다. 퇴직금이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웹툰을 공부할 비용도 건질 수 없었다. 일하다가 흉통이 느껴져서 쓰러지고 일주일 넘게 결근한 적도 있지만, 퇴직금만 바라보고 견뎠다. 민폐인 줄은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어코 1년이 지났다. 바로 퇴사했다. 남은 건 천장까지 닿을 것 같은 책 무더기와 전자도서 천 권, 퇴직금으로 받은 220만 원이었다. 의욕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방향을 잃고 붕 떠버렸다.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는데, 우연히 칼럼 공모전 광고를 봤다. 주제는 저출산과 자살율 대책이었다. 평소에 심각하게 생각하고 공부하던 문제였다. 밑져야 본 전이니, 자료를 모아서 원고를 썼다. 살면서 처음으로 공모전에 당선됐다. 담당자가 말해주기를, 원래 여러 명을 뽑을 예정이었지만 마땅한 글이 없어서 나 혼자 당선되었다고 했다. 계시를 받은 듯했다. '너의 고난과 책은 글을 위한 것이다.' 이때부터 글로 먹고 살기로 결심했다. 능력을 증명했으니, 해 볼 만하지 않을까. 세상에 넘치는 게 글이라지만, 그 중에서 읽을 만한 건 얼마되지 않는다. 한 문장으로 한 페이지를 채우는 에세이가 팔리는 세상이 아닌가. 그 사이에 내가 설 자리가 없을까. 이런 생각을 곱씹고 있던 것이 이십대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그 뒤로 또 한 해가 지났다. 글로 먹고 살자고 정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글쓰기는 조금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가시적인 성과라고 할 만한 건 없다.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 걸까. 역시 남은 건 공모전 뿐일까. 책이라도 써야 할까. 내가 책을 낸다고 해서 누가 사 줄까. 관련 업계에 취직해야 할까. 내게 희망이 있을까. 오늘도 고민으로 밤을 지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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