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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May 25. 2023

믿는 사람을 위한 변론

안양천으로 둘러쌓인 석수동은 스타벅스 하나 없는 작은 동네다. 그런 동네에, 내가 직접 간판을 본 교회만 3곳이 있다.

"예수 믿으세요~." 삼거리를 지나다 보면, 띠를 두른 봉사자를 자주 만난다. 50대 여성처럼 보이는 봉사자는 작은 팜플렛과 함께 일회용 티슈나 1.5L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나눠준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면서도, 봉사자는 해가 질 때까지 낭랑한 목소리로 팜플렛을 내민다.

나도 팜플랫을 내밀면 외면하는 쪽이다. 팜플렛을 받아봐야, 십 년 넘게 냉담하는 중인 우리 집에서는 누구도 읽지 않는다. 낮에 마음껏 잘 수 있는 일요일을 아는 사람도 없는 교회에 봉헌하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우리 집은 1.5 리터가 아니라 2.5 리터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쓴다.

어릴 때에는 신앙심이 있었다. 자기 전에 세상을 내려다보는 하느님 아버지에게 열심히 기도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용서를 구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죽음의 골자기로 들어가더라도 하느님이 함께 계실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우리 집이 천주교를 믿었다. 그 뿐이었다.

순진한 마음으로 품고 있던 신앙심은 금방 무너졌다. 머리가 좀 크자, 하늘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존재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존재를 믿기에는, 세상에 나쁜 사람이 너무 많아 보였다. 열심히 관리하는 점장이 있다면 매장이 지저분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을 내려다보며 관리하는 존재가 있다면 세상도 지금보다 평화롭고 질서정연해야 하지 않을까? 내 부족한 머리는 이런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기도를 멈췄다.

신앙을 버린 대가는 가혹했다. 처음에는 어릴 때 쓴 일기장을 버리듯이 가볍게 신앙을 내려놓았다. 몇 달 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 처벌은 서서히 다가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쁜 부작용이 나타났다.

우선 일상이 선택지로 가득찼다. 신앙이 있을 때에는 삶에 질서가 있었다. 어떤 선택지를 왜 골라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자책하더라도 옳고 그름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신앙의 인도가 사라지자, 마음 속이 불신으로 가득찼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말든, 어떤 행동을 왜 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흔히 선택권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안내 없이 선택권만 있는 곳은 지옥이었다.

더 큰 문제는 삶도 선택지 중 하나로 보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날 괴롭게 하는 부모 밑에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다 보니, 궁극적인 고민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삶은 고통스러운데, 굳이 왜 살아야 하는가? 이때가 10대 후반 즈음이었는데, 내 기억에 이때부터 불안장애 징조가 있었던 것 같다. 호흡이 불안정할 때가 있었고, 작은 일에도 흉통을 느꼈다.

10년, 이 공허함에서 조금 멀어지는 데에 10년 이상 걸렸다. 지금도 내가 정리한 삶의 철학이 옳은지 확신이 없다. 단지 내 시선에서 최선이라 붙잡고 있을 뿐이다. 옛 신앙을 되찾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안에는 신앙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긍정적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그런 믿음이 자리잡은 뒤에야, 나는 삶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간혹 도킨스나 히친스의 책만 읽고 신앙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듯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무책임해 보인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 타인의 삶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신앙을 잃는다는 것은 산타를 믿지 않게 되었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삶의 가치 전체를 부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신앙은 누군가에게 유일한 지팡이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론을 들고 오든, 지팡이를 빼앗는 짓이 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타인의 신앙을 무분별하게 모욕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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