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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공대생 May 28. 2021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따로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 소설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소설이 바로 <멋진 신세계>이니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1984>보다 <멋진 신세계> 속 디스토피아가 지금과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1984>를 아직 못 읽었다는 건 비밀이다.) 참고로 이번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안 읽으신 독자 분들은 조심하시길.


<멋진 신세계> 속 사회는 말 그대로 멋진 신세계다. 질병도 가난도 불행도 고통도 없는 세계. 행복만이 가득한 세계. 그러나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어야만 한다. 세뇌 교육으로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행복을 느끼며 수행하는 사회에서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자유가 주어진다면 인간들은 각자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테고 그러면 직업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억압하려면 인간의 사고를 억압해야 하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금지된다. 철학, 종교, 예술 등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쾌락을 추구하는 촉감 영화(지금으로 치면 4D 영화쯤 되려나)와 첨단 스포츠, 향기 오르간이 대신한다. 그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이 자유를 넘본다면 소마를 주면 된다. 부작용이 없는 완벽한 마약 소마를. 그렇게 멋진 신세계는 모든 이가 각자 주어진 일을 하며 행복을 느끼고 촉감 영화와 스포츠, 향기 오르간으로 즐거움을 소비하며 완벽한 마약 소마로 쾌락을 맛보면서 끝없이 이어진다. 다음 세대로, 또 그다음 세대로. 영원히 같은 것들을 반복하며.


자유가 없지만 모두가 행복한 이 세계를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라고 표현했다. 당연히 반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자유 없이 모두가 행복한 세계, 인공적으로 인간을 탄생시키고 세뇌하여 완벽한 사회구조를 지탱하는 세계, 철학과 예술과 종교 대신 급속한 쾌락의 도구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세계에 우리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불행하고 고통받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에도 그 세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내내 생각한 건 도대체 그 거부감의 합리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였다.


나는 분명 소설을 읽으며 그 속의 세계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지만 도무지 그 거부감의 합리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 왜 인간은 자유가 없으면 안 되는가, 자유가 없어도 모두가 행복하다면 충분한 것 아닌가, 철학과 종교와 예술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작용 없는 완벽한 행복을 소마가 가져다준다면 그것이 인간이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며 얻는 행복과 다른 점은 무엇이며 소마의 복용으로 느끼는 행복에 대해 내가 느끼는 거부감을 설명 가능한 어떤 근거가 있는가. 사실 이것들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어야 할 이유도, 철학과 종교와 예술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도, 소마로 인한 행복이 잘못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유 없이 태어나 존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이 종교의 세계에서 과학의 세계로 넘어가는 인류가 겪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과학 이전의 신이 존재하던 종교의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는 신을 통해 보장되었다. 신이 인간을 이 땅에 내려보냈고 인간은 신의 뜻을 받들어 죽은 뒤 신에게 가기 위해 이승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종교의 세계가 말하는 인간의 존재 이유였다. 그러나 과학의 세계로 넘어오며 신은 사라졌고 과학은 아직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어디에 도착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인류는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데 아무 이유도 없다면 인간다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소설 속 세계가 잘못되었다고, 인간은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거부감을 점점 파고들어 가다 보면 그것을 설명할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냥 느끼는 것이다. 이유는 없지만 잘못되었다고. 이 소설은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면서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철학적 질문을 함께 던진다. 그 질문에 인간이 답을 찾는 날은 매우 멀거나 혹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 과학은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은 두 가지뿐이다. 이미 죽은 신에게 기도하거나 과학이 답을 줄 것이라 맹목적으로 믿으며 멋진 신세계를 만들거나.


마지막 결말에서 자살한 존은 원시인의 세계(종교의 세계)에서 현대인의 세계(과학의 세계)로 넘어온 인물이다. 그는 두 세계를 모두 겪고 난 뒤 목숨을 끊는다. 목을 맨 존의 발은 방향을 잡지 못하는 나침반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인류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보여주는 탁월한 결말이다. 흔들리는 나침반으로는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인류는 흔들리는 나침반을 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멋진 신세계> 일지 <1984> 일지 성경으로의 회귀일지 혹은 전혀 다른 어떤 곳일지.


소설 속 한 문장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긋한 두 개의 나침반 바늘처럼 두 발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북쪽, 북동쪽, 동쪽, 남동쪽, 남쪽, 남남서쪽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잠깐 멈추었고, 몇 초가 지난 다음에 서두르지 않고 다시 왼쪽으로 돌았다. 남남서쪽, 남쪽, 남동쪽,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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