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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공대생 Jul 04. 2019

유토피아

'유토피아' / 미나토 가나에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도서관에서 여러 가지 책들을 뒤적거리다 일본 소설이 있는 코너에서 집어 든 책이 바로 이 유토피아였다. 책 뒤표지에 쓰여 있는 "세 개의 시선으로 그려진 '선의가 향하는 끝'"이라는 문구가 흥미를 자극했다. 저자인 미나토 가나에는 지금까지 자기가 써왔던 소설들에서는 사람이 가진 악의를 파고드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악의를 계기로 일어난 일들은 생각보다 인과관계나 그 해결방법이 명확한 경우가 많았다면서 과연 사람들의 선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뒤엉키면서 생겨나는 사건들은 어떻게 그려지고 또 어떻게 해결되는지 써 보고 싶은 마음에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말했다. 저자의 목표는 성공한 것 같다. 이 소설은 사람의 선의가 어떻게 타인에 의해 뒤틀리게 비추어지고 오해받는지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인간의 순수한 선의와 또 그를 왜곡하는 인간의 의심과 불신을 모두 엿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이야기는 작은 항구마을인 하나사키 초에서 시작된다. 하나사키초 상점가에 대대로 이어오던 불교용품점의 며느리 나나코와 남편의 전근으로 하나사키초에 오게 된 미쓰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흙을 찾기 위해 대도시에서 이주해 온 도예가 스미레. 이 세 명의 여인은 하나사키초 상점가 부흥을 위한 축제에 참여하는데 축제 도중 상점가에서 일어난 화재에 나나코의 딸 쿠미카와 미쓰키의 딸 사야코가 휘말리게 된다. 다행히 사야코가 다리가 불편한 쿠미카를 업고 나오면서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상태에서 사건이 마무리된다. 그런데 초등학생인 어린 사야코가 같은 학교 친구인 다리가 불편한 쿠미카를 조그만 몸으로 업고 나온 이야기가 미담으로 퍼지면서 스미레의 주도 아래 세 여성은 쿠미카와 사야코를 마스코트로 다리가 불편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클라라의 날개라는 복지단체를 설립하게 된다. 그러나 세 사람의 순수한 선의로 만들어진 복지 단체 클라라의 날개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신과 의심의 시선으로 비치며 사실 번 돈을 빼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쿠미카가 사실 다리가 불편하지 않다더라 등등의 소문이 돌게 되고 세 여성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의 시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사야코와 쿠미카가 사라지는 사건이 생기면서 이야기는 결말로 향한다.(반전이 있기에 결말은 적지 않는 걸로.)



세 여성 모두 딱히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타인을 도우려는 좋은 마음으로 클라라의 날개라는 복지단체를 설립하고 운영해나간다. 개인적 이득이나 사욕은 전혀 채우지 않고. 그렇게 순조롭게 운영되어가는 듯하던 클라라의 날개는 시간이 갈수록 타인들이 멋대로 의심하고 불신하며 퍼뜨리는 악소문들에 시달린다. 심지어 함께 클라라의 날개를 만든 세 여성조차도 서로의 의도를 곡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로 세 여성의 마음도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한다. 미쓰키는 점점 자신의 딸 사야코를 클라라의 날개를 통해 매스컴에 노출시켜 아역배우나 모델로 성공시키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비치고 스미레도 도예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 위한 장치로 클라라의 날개를 이용한다.



안타깝지만 그게 바로 현실이라는 것이 너무 명징하게 가슴속에 와 닿았다. 현재의 세상은 순수한 의도로 하는 선행들도 댓글 몇 개나 페이크 뉴스 하나로 순식간에 악의적인 행동으로 둔갑하고 만다. 한 연예인이 1억을 기부했다는 기사가 뜨면 그곳에는 연예인의 선행을 칭찬하는 댓글이 아니라 이미지 세탁한다, 세금 안 내려고 한다 등의 악플이 먼저 달리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현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순수한 의도와 마음을 투명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떻게든 그 속에 숨은 악의와 욕할 거리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그리고 결국은 찾아낸다. 실제로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멋대로 악의를 만들어내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이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클라라의 날개에 참여한 나나코와 클라라의 날개를 비방하고 욕하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 순수한 의도로 선을 행하는 인간과 존재하지도 않는 악의를 멋대로 만들어 내 비방하는 인간들. 인간이라는 존재의 희망적인 면과 절망적인 면 양쪽을 이 소설 속에서 뚜렷하게 엿볼 수 있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점은 의도와 행동의 분리가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미쓰키와 스미레는 처음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시간이 갈수록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클라라의 날개를 이용한다. 미쓰키는 자신의 딸 사야코를 위해, 스미레는 자신의 도예가로서의 명성을 위해. 하지만 그러한 의도로 클라라의 날개를 운영한다고 해서 순수한 의도로 시작했을 때와 하는 일들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클라라의 날개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들은 모두 기부금으로 사용되었고 그에 부수적으로 미쓰키와 스미레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되었을 뿐이다. 의도가 자신의 사욕을 위해서였을지라도 그들이 한 행동은 분명한 선행이다. 그렇다면 미쓰키와 스미레를 과연 어떤 사람으로 평가해야 할까.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선행을 한 사람으로 기억해야 할까 아니면 그 속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의 사욕을 위해 복지단체를 이용한 자로 기억해야 할까.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은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도가 어떠했고 어떤 생각으로 행했든 간에 선행으로 인해 도움을 받고 희망을 찾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선행 자체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사실 의도를 아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냥 좋은 의도로 했다고 믿고 선행을 맘 편하게 칭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물론 필자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모두가 맞는 의견이다. 이런 생각에 있어서 정답이란 없으니까. 필자는 그저 한 번쯤 이 소설을 읽어보면서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을 권할 뿐이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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