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누군지도,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제목만 보고 집어 든 책이었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멀리서 보면 다들 비슷비슷하게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하나하나가 전부 다르고, 특별하다. 모두가 단 하나뿐인 존재라는 것.
이 책은 여섯 편의 소설이 묶여 있는 소설집이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프랑스어 초급과정, 스페인 도둑,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금성녀 이렇게 여섯 개의 짧은 소설들이 한 책에 들어있다. 문예지들에 은희경 작가님이 발표한 소설들을 묶은 것인데 신기하게도 각 소설들의 내용이 서로 묘하게 얽혀 들어간다. 서로 다른 문예지에 각각 다른 시기에 발표한 작품들인데도 말이다. 한 소설의 주인공이 다른 소설의 주인공의 어머니라거나, 같은 등장인물이 두 소설에 같이 등장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정확히 같은 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나 장면은 없으면서도 쭉 소설을 읽다 보면 왠지 이 주인공 아까 전 소설에 나왔던 인물이랑 비슷한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작가님이 일부러 의도한 것이 맞는지, 실제로 같은 인물인지에 대한 확증도 없지만 각각 하나의 완결된 소설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은 소설에 한층 깊숙이 빠져들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이 소설집에 있는 소설들에서 필자가 느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이방인.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한 마을에서 살아오다가 서울로 유학을 온 소녀,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 남편을 따라 서울에서 신도시로 이주한 아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청년, 해외로 떠난 친구 집에 잠시 살게 된 여성 등. 멀던 가깝던 모든 주인공들이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떠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 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소설은 스페인 도둑이었다. 여자 주인공인 소영은 자신이 살던 신도시에서 단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고 남자 주인공인 완은 학창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얼핏 보면 다른 소설들과 달리 이방인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소영은 한 도시에서 쭉 살아왔고 완도 미국으로 떠났다가 다시 자신이 살던 도시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완은 한국의, 자신이 살던 도시로 돌아오고도 이방인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도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어릴 적 어렴풋한 기억 속의 여자 아이는 은행 여직원이 되어 있고 아버지의 모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몸은 어릴 적 살던 곳으로 돌아왔지만 머리는 여전히 자신이 이 곳에 속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완. 그는 어느 곳도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비관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받아들일 뿐이다. 굳이 어딘가에 속하려고 하지 않고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 그는 스스로 이방인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정신적인 이방인.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서 이방인이 된다. 실제로 어디 먼 곳으로 떠나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소외되거나 속했던 집단에서 나오면서 자신이 어디에도 포함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이 시대에서 우리가 익숙해져야 하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는 다양한 이방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며 지금 어딘가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독자들을 꼭 붙들어준다. 사랑하는 이의 헌신이 결코 줄 수 없는 방심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이방인의 부축을 이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기를.
소설 속 한 문장 : 그리고 이방인의 부축이란 사랑하는 이의 헌신이 결코 줄 수 없는 방심과 편안함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