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이번에 읽어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1에서 9회까지의 수상작품집을 놓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좋은 작가와 좋은 소설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앞으로 매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총 7편의 소설들은 다채로웠고 각각이 독창적이었으며 그 때문에 각 편마다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지만 그러려면 한 편마다 따로따로 리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여기서는 한 소설당 한 문단 정도 간단한 감상평을 남기기로 하겠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 박상영
주인공인 '나'가 운동권 학생이었으며 지금도 서구 열강을 끔찍이 싫어하는 옛 애인과 암에 걸렸지만 한시도 불쌍하게 여길 수 없는 엄마 사이에서 겪는 일들을 그린 소설이다. 아직도, 어쩌면 오랫동안 벗어날 수 없을 두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그저 살아갈 뿐이다. 분노하기도 하고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뻐하기도 하면서. '나'와의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싫어하고 창피해하는 동시에 과거의 운동권 학생 시절에 사로잡혀 있는 옛 애인. 언제나 강건하던, 그리고 '나'를 밀어내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에 놔둔, 그러나 암에 걸리고 성경을 필사하는 엄마. '나'는 그 둘을 추억하고 기억하고 증오하고 원망하고 안쓰러워하고 행복해하면서 삶을 산다. 그 지점에서 오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사람 간의 관계가 주는 감정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또 다른 좋았던 점은 게이의 연애를 특별하게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성애와 다르게, 뭔가 특별하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중요하게 그리지 않은 게이 커플의 연애 이야기는 성별이 별 의미를 가지지 않는 그냥 서로 사랑했던 한 커플의 이야기였고 그 부분이 세심하고 좋았다.
'공의 기원' / 김희선
재밌다. 일단 재밌다. 필자는 이 소설이 거짓말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작가의 뻔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실제로 지금의 축구공이 이렇게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고 인터넷에 검색해보기까지 했다. 비유하자면, 만우절 거짓말 대회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 대회에 나온 사람이 하는 말이 당연히 거짓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대회에 나온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데 거짓말인 걸 알고 듣는데도 사실인가? 진짜 있었던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더니 급기야 이 대회가 만우절 거짓말 대회라는 걸 잊게 만들어 버렸다고 해야 할까. 교묘하게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말인지 알 수가 없다. 제대로 속아 넘어간 기분이다. 한편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란 명확한 선으로 재단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 공의 기원과 실제로 지금의 축구공이 만들어진 진실된 기원의 이야기가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진짜를 가려낼 수 있을까? 진짜도 가짜가 되고 가짜도 진짜가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시간의 궤적' / 백수린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두 한국인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프랑스에서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겠다는 목표로 한국을 떠난 '나'와 프랑스에서 주재원 일을 하고 있는 언니. 둘은 타지에 놓인 한국인이라는 동질성을 매개로 아주 끈끈한 사이가 된다. 하지만 '나'가 프랑스 남자와 결혼을 하고 꿈을 버린 채 주부가 되면서 둘의 사이는 조금씩 금이 간다. 프랑스에 정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브리스와의 결혼 생활이 지속되면 될수록 '나'는 프랑스라는 땅에 뿌리를 뻗지 못한 채 부유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느낌, 브리스의 아내로, 남편의 부속품으로 존재하는 느낌을 받은 '나'는 주재원 생활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언니에게 말한다.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
필자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타국에서 사는 한국인, 여성으로서의 삶, 주체적이지 못한 존재라는 느낌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프랑스인과 결혼한 '나'는 물론이고 언니도 남성이 다수인 주재원 그룹에서의 철저한 약자이자 가십거리이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끝나게 된다. 그것이 그 둘의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일까? 필자는 소외된 자이자 사회적 약자의 상황에 놓인 둘의 어쩔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비틀린 동경과 선망이 그런 결과를 이끌어 냈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움과 이해가 동시에 찾아오면서 '나'와 언니를 모두 토닥여주고 싶은 결말이었다.
'넌 쉽게 말했지만' / 이주란
이 소설에는 딱히 서사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흥미진진한 사건이나 이야기 전개도 없고 서울에서 시골의 어머니 집으로 들어온 '나'가 시골 생활을 하는 이야기가 전부다. 그마저도 별 이야기가 없다. 예전 친구들과 가끔 데이트 비슷한 것도 하고 영화도 보고 엄마와 요리를 해 먹거나 산책하면서 미나리를 뽑고. 그나마 조금 긴장감을 주는 것이 석기와의 에피소드인데 그것도 석기가 [씨발, 너 진짜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끝난다. 얼핏 보면 지루한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글로 쓰이지 않은 부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나'의 과거의 조각들을 짜 맞추면서 소설 속에 글로 쓰여 있지는 않지만 '나'가 갑자기 엄마가 있는 시골집으로 돌아온 이유, 서울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고난, 외로움들을 읽을 수 있었다. 글이 없는 빈 여백을 읽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가 서울에서 이러한 일들을 겪어서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했고 내려와서 휴식을 하다가 다시 힘을 내서 서울로 돌아가는 것까지 모두 쓰인 소설이었다면 서사는 완성되었겠지만 여백을 독자 스스로 상상하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읽어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가 엄마와, 예전 친구들과 살아가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그 외의 부분은 모두 독자가 스스로 쓰고 읽도록 만들었기에 이 소설은 조금 다른 방식의 공감과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쓰지 않음으로써 썼다고 해야 할까.
'우리들' / 정영수
'나'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책으로 내달라는 정은과 현수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정은과 현수는 각자 배우자가 있으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나'는 정은과 현수의 모습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들을 통해 자신과 연경의 관계를 계속해서 돌아본다. '나'와 연경의 관계와 정은과 현수의 관계의 극적인 대비, 어리고 어설프고 각자 자신만의 사랑을 주장했던 '나'와 연경의 관계는 진정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어른의 사랑을 하고 있는 정은과 연수의 관계와 대비되면서 '나'를 점점 더 그 둘의 관계에 빠져들게 만든다. 하지만 그 관계는 현수의 한마디로 끝난다. [우리 매년 여름마다 여기 올까?]라는 현수의 한마디. 각자 배우자가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이어가던 정은과 현수의 관계는 진정한 어른의 관계가 아니었다. 언젠가 끝날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책임조차 지기 싫어 열정적으로 부딪히지 않았던 관계가 바로 그 둘이었고 외면하고 있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현수가 꺼내는 순간 미래의 책임과 종말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진정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어른의 사랑처럼 보였던 둘의 관계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나'는 정은과 현수에 대해, '나'와 연경에 대해 글을 완성했을까? 약속된 끝을 재촉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질문인 것일까.
'데이 포 나이트' / 김봉곤
이 소설에서는 한 문장에 꽂혔다.
[H선생님과의 빙빙 돌아가는 대화, 불분명한 송수신 방향, 느리게 오가는 속도 들을 나는 좋아했다.]
이 문장인데 속도들을 이 아니라 속도 들을 이라고 띄어쓰기를 한 부분이 가슴에 확 꽂혔다. 무엇 때문에 저 띄어쓰기 하나가 감정을 건드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다 저 문장을 마주하고 다섯 번 정도 저 문장을 반복해서 읽으며 문장의 맛을 느꼈다. 처음 해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자신의 잊고 싶은 과거의 동성 연인 종인 선배를 기억하는 내용이다. 전적으로 퀴어 서사가 중점이 된다는 면에서 '우럭 한 점 우주의 맛'과 다르다. 종인 선배는 취하면 '나'와 섹스를 하며 동시에 '나'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다. '나'는 그 폭력을 고스란히 감당하며 종인 선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 둘의 끝은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어쨌든 둘의 관계는 끝이 난다. 긴 시간이 지난 후, 지금의 '나'는 우연히 종인 선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이는 '나'를 얼어붙게 만드고 욕이 나오게 만들 만큼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걸 '나'는 깨닫는다. 종인과의 관계에서 받았던 사랑으로 위장된 상처와 고통을 직시하지 않은 채로 저 속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이 소설은 결국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숨겨놓았던 그것을 꺼내 바라보고 되새기고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가 종인 선배와의 기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되감은 후, 결국 [한참을 걸어가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그곳에는 H선생님도, 종인 선배도, 나도 없었]듯이.
'하긴' / 이미상
'나'가 딸 보미나래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그 이유는? 딸의 미래를 위해서? 아니면 딸이 사회에서 무시받지 않게 하려고? 전혀. 딸은 '나'의 소유물이고 내 딸이 좋은 대학에 못 간다는 것은 곧 '나'의 사회적 평판이자 '나'의 위치 하락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보미나래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딸을 미국의 에코 공동체에서 1년간 생활하게 하고 그곳의 생활로 영화제에 출품할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상을 받는다. 그 상을 가지고 딸을 경기도 한 대학의 사회학과에 입학시키는 장대한 계획. 딸이 가지고 온 별 쓸모도 없는 사진과 영상들로 어떻게든 혼자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는 '나'는 갑갑하던 차에 술자리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한창 술을 마시던 중 딸이 산부인과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더니 딸은 피부가 검은 아이를 낳았다. 미국에서 성폭행을 당했거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거라고 믿는 '나'의 아내와 검은 피부의 손자인 샘을 지극히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나'. 그리고 임테기 천사가 된 보미나래를 보여주며 소설은 끝이 난다.
유독 한국에서는 아이는 부모의 전적인 소유물이자 부속품이라고 여기는 느낌이 있다. 부모가 아이를 때려가며 공부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에 잘 따르고 얌전히 공부 잘하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과연 그렇게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야 할 때 자신의 두 발로 삶을 걸어갈 수 있을까?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닐뿐더러 부모의 간섭과 조종이 없더라도 생각보다 스스로 행복하게 산다. 부모의 뜻대로 전혀 이뤄지지 않은 보미나래가 누군가의 위로이자 희망인 임테기 천사가 되었듯이 말이다.
어딘가에서 보았다.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보면 현대의 문학을 이끌어가는 작가 중 자신의 맘에 드는 작가를 적어도 한 명은 반드시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말. 필자에게는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었다. 한국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떤 것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은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으로 독서를 시작해보기 바란다. 당신의 작가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