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이 소설은 이반 데니소비치(슈호프)라는 한 인물이 수용소에서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아무런 치장 없이 그대로 그려 내고 있다. 마치 식탐 많은 어린아이처럼 멀건 귀리죽 한 그릇을 놓고 다투는 죄수들의 모습은 웃긴 동시에 슬픔과 분노를 불러온다. 서로 상반된 감정을 한 문장으로 동시에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책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설이다. 전쟁에 참여해 훈장을 받기도 했던 그였지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인 스탈린에 대한 조롱이 문제가 되어 소련의 정치범 수용소 굴라크로 보내져 8년간 수용소 생활을 겪었고 그 기간 동안 보고 듣고 겪은 것을 바탕으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제1원에서>, <수용소 군도> 등의 작품을 써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인생에 비추어봤을 때 이 소설의 흠잡을 데 없는 현실감과 사실성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소설의 내용은 별다를 것이 없다. 수용소 죄수인 이반 데니소비치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겪은 일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솔제니친의 인생과 결부되면 그 무게가 달라진다. 허구의 인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지만 작가가 8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직접 겪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소설 속 이야기가 허구를 이용해 현실을 묘사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그 지점에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그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블랙코미디가 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행동을 보면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추운 날씨에 일하기 싫어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의무실에서 쉬고 싶어 하는 모습이나(물론 그 추운 날씨가 영하 40도를 넘나들긴 한다.) 담배 한 개비에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 어떻게든 멀건 죽 한 그릇을 더 차지해보고자 다투고 아부하고 거짓말하는 장면, 몰래 시트에 숨겨 놓은 빵껍질이 사라질까 불안해하는 모습까지. 특히 그중에서도 멀건 귀리죽 한 그릇을 더 먹게 되자 행복감에 물들어 경건하기까지 한 자세로 죽을 말끔히 해치우는 모습은 마치 사탕 하나를 더 받고 너무나 기뻐하는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점점 진행될수록 담배 하나를 얻어 피우고자, 혹은 건더기는 보이지도 않는 죽 한 그릇을 더 먹고자 이반 데니소비치가 기울이는 필사의 노력들을 마냥 유머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게 된다. 의문이 들고 마는 것이다. 왜 이들은 이 열악한 수용소에서, 바깥에서는 먹지도 않을 멀건 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이토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형식적으로 말한다면, 슈호프가 수용소에 들어온 죄목은 반역죄이다. 그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또 일부러 조국을 배반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고, 포로가 된 다음 풀려난 것은 독일 첩보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수행할 계획이었는지는 슈호프 자신도, 취조관도 꾸며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목적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결정을 내렸다.' (p.83)
이반 데니소비치는 자신도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온갖 열악한 환경과 불합리한 대우와 고된 노동을 감수하며 10년의 형량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10년의 형량이 끝나고 수용소 밖으로 나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온 힘을 다해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있던 이반 데니소비치. 죽 한 그릇에 거의 목숨을 거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모습은 분명 기묘하고 웃기지만 그 행동의 밑바탕과 근원에 깔린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독자는 스탈린의 독재 체재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누명을 쓰고 수용소로 보내졌는지, 열악한 수용소에서 죄 없는 이들이 몇이나 죽어 나갔는지,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행되어 왔는지를 이반 데니소비치와 수용소 안 인물들의 하루를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이 고전이자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독자들이 당시의 러시아 상황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방식에 있다. 솔제니친은 자신이 8년간 수용소 생활을 겪었음에도 당시의 분노와 좌절, 복수심을 접어두고 철저히 객관적인 거리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그린다. 만약 글 속에 스탈린의 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공산주의 독재 체제에 대한 분노, 억울한 수용소 생활에 대한 복수심이 직접적으로 거론되었다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고전으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솔제니친은 담담하게 한 수용소 죄수의 하루를 그림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 당시의 소련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판단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잘못을 저지른 누군가에게 당신이 한 일은 잘못됐다고 날 선 비판의 말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일로 인해 벌어진 결과를 그대로, 가감 없이 눈 앞에 보여준 것이다. 전자와 후자 중 어떤 방법이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데 더욱 효과적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후자이며, 솔제니친은 그보다 더 치명적일 수는 없는 비판을 후자의 품위 있는 방식을 통해 당시 소련의 권력자들, 정치인들, 그리고 스탈린에게 가한 것과 다름없다.(소련 정부와 소련 작가 연맹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솔제니친에게 노벨상을 포기하던가, 아님 전향이나 추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경고하는 찌질함을 보여준다. 솔제니친은 결국 소련을 떠나 노벨상을 수상한다.) 작가로서 당시 소련 사회에 세련된 방식으로 통렬한 비판을 가한 그의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위에 인용한 소설 속 문장을 보면 이보다 더한 블랙코미디가 있을까 싶다. 아무도 반역의 목적을 모르는 반역죄라니. 심지어 죄를 지은 당사자조차도 모른다. 더 웃픈 건 이러한 일들이 고작 100년도 안 된 과거에 수없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주변을 살펴야 한다. 언제 내가, 혹은 당신이 이반 데니소비치가 될지 모른다.
소설 속 한 문장
봐라, 지금 슈호프는 사백 그램의 빵과 이백 그램의 빵을 차지한 것이다. 게다가 침대 시트에 이백 그램짜리 빵이 하나 더 있다. 더 이상, 뭘 더 바랄 것인가? (p.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