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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공대생 Apr 08. 2020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장강명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 장강명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은 이전에 리뷰했던 <산 자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책이다. <산 자들>과는 전혀 다른 결의 소설집인데 주로 SF 혹은 판타지로 분류될 법한 중단편 소설 10편이 실려있다. 분량은 몇 페이지짜리 아주 짧은 엽편부터 100 페이지가 넘는 중편도 실려 있는데 각 소설들의 다양한 주제, 서사, 소재 등을 보는 맛이 있는 소설집이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건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이었다. 유대인들이 통치하는 알래스카에서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이 재판을 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체험공유장치'라는 기계가 등장한다. 이 기계는 사람의 체험을 다른 사람과 연동시켜 직접 타인의 경험을 겪어볼 수 있게 해 주는 기계다. 그 당시 자신의 위치에 있던 사람은 그 누구라도 자신과 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히만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에밀 벤야민과 아이히만이 각자의 체험을 '체험공유장치'를 통해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끝난 이후의 몇 년 동안까지 서로 공유하기로 한다. 유대인들은 체험을 공유한 이후, 벤야민이 당당히 일어서 아이히만의 경험을 나도 모두 겪어보았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그저 비열한 악인일 뿐이다 라고 말하리라 믿지만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사람 간의 완전한 소통과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요즘 들어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의 의미를 상대방이 인지하고 이해하리라고 믿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옮긴 문장을 읽는 사람이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의 소통은 불완전하다고 믿는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말과 글과 행동을 받아들이기 마련이며 상대방이 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갇혀 있고 상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인간은 다른 인간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 불완전한 소통을 조금 더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공감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인간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공감성이 높은 사회라면 뉴스에 나오는 온갖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정반대의 질문을 내놓았고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이 온전히 좋은 일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내 가족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교통사고를 낸 가해자가 느끼고 있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죄책감과 절망을 내가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면, 그래서 도저히 그 가해자를 비난할 수 없게 되고 만다면 내 슬픔과 적의와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만 하는 것일까. 향할 곳을 찾지 못한 그 어두운 감정들이 결국 내 안에 쌓이고 쌓여 나를 절벽 밑으로 떠밀어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가해자에게 가해질 법적 처벌조차 그가 겪는 죄책감과 절망을 겪은 내가 보기에 너무나 크고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되어 버린다면, 법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어진다. 절대적인 선악과 법이 사라지고 모든 일들에 대해 서로의 감정과 경험의 비율을 통해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새로운 규칙이 생겨나야 하는 걸까?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을 읽고, 나는 인간이란 존재가 불완전한 소통과 완전한 소통 사이의 어느 부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고 말았다.(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을 워낙 인상 깊게 읽어서 진지한 이야기가 좀 길어지고 말았지만 사실 재미에 집중해 읽기 최적화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이스 배틀 로얄물(?)이라고 불러야 될 것 같은 <아스타틴>이나 우주에서 태어난 초능력자의 이야기를 다룬 <알골>은 장강명 식 우주 SF 소설의 재미를 보여주고 <정시에 복용하십시오>나 <센서스 코무니스>, <데이터 시대의 사랑> 같은 현대 사회에 SF 요소를 접목한 소설들은 곧 이런 일들이 진짜 일어나는 건 아닐까, 지구 어딘가에서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실감 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표백>이나 <산 자들>의 장강명과 다른 장강명을 보고 싶다면 추천하고픈 책이다.


소설 속 한 문장


'타인은 타인인 채로 남아 있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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