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 제임스 조이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율리시스> 일 것이다. 그 문학성과 더불어 난해함으로도 유명한 그 책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작가 자신이 창조해낸 새로운 단어와 신화의 서사, 상징, 비유를 버무려 만든 영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조이스는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작가이기도 하다. 당시의 모더니즘 문학을 주도했으며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게 된 건 조이스의 작품 중에 그나마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조이스의 소설을 한 번쯤 읽어보고 싶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하는지라 단편집인 <더블린 사람들>을 제하고 너무 허들이 높아 보이는 <율리시스>와 <피네간의 경야>를 제하자 남은 게 바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작품을 읽은 감상은...... 못 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읽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이 정도인데 <율리시스>나 <피네간의 경야>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읽는 걸까.)
사실 읽기 어려운 것 치고 소설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스티븐 디덜러스의 성장기이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한 주인공이 가정에서 떠나는 시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 명문 쿨롱고우스 학교에 다니던 스티븐은 가세가 기울며 학교를 그만두고 더블린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신부가 또 다른 명문 벨비디어 학교에서 스티븐이 수학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곳에서 종교와 하느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 좋은 수학 태도와 성적을 보여준 스티븐에게 벨비디어의 교장이 성직자의 길을 제안하지만 스티븐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어느 순간 자신의 길이 창조적인 예술가가 되는 것임을 깨달은 스티븐은 자기 나름의 이론적 무장과 준비를 마치고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을 살기 위해 가정과 더블린과 조국 아일랜드를 떠난다.
그리 어렵지 않고 간단한 스토리임에도 널뛰기를 하듯 현실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주인공의 의식을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서술 기법 때문에 읽는 것이 쉽지 않다. 그에 더해 생소한 아일랜드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 상황 및 종교적 상황을 모르면 해석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기반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그나마 수월하게 읽어 나갈 수 있다.(1장을 읽고 나서 책 뒤에 있는 아일랜드 역사 개요와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아일랜드에서 종교가 가지는 의미를 다 찾아서 머릿속에 집어넣은 뒤에 2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한 어려움을 상쇄시킬만한 장점이라고 한다면 문장과 묘사,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서술을 들 수 있겠다. 굉장히 탐미적인 문체가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상세하고 직관적인 묘사(특히 지옥에 대해 신부의 입을 빌려 묘사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 부분만은 정말 빠져들듯이 읽었다.)가 매우 뛰어나며 시점과 화자와 시간대와 인물의 내외부 의식이 쉴 새 없이 바뀌면서도 끊기는 부분 없이 자연스럽게 서술되는 글의 흐름은 감탄을 자아낸다.(읽는 독자조차도 언제 시간이나 시점이 바뀐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과거 얘기인 줄 알고 읽고 있는데 이상해서 앞으로 돌아가 보면 이미 한 페이지 전부터 현재 얘기로 다시 돌아와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이토록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게 서술하는 것 자체가 매우,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개인적으로 소설의 초반부와 후반부는 나름 재미를 느끼며 읽었다. 어린 스티븐이 어린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계와 종교적인 관점들은 흥미로웠고, 청소년이 되어 처음으로 창녀촌에 가서 여성과 관계를 맺은 스티븐이 하느님의 규율을 어겼다는 죄책감을 느껴 지옥에 갈 것을 두려워하며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은 꽤나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후반부에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스티븐이 여러 철학자와 종교인들의 사상을 공부해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하고 꿈과 자유를 위해 집과 조국을 떠나는 장면은 스티븐의 정신적 성장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스티븐이 말하는 자신의 생각과 그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아퀴나스의 사상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던 영역을 건드려 지식과 생각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의 중반부는 지옥이었다. 전혀 스티븐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없었고 그의 선택도 하나 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영원히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죄를 뉘우치며 살 것처럼 말하던 스티븐이 성직자 생활의 냉기와 성실함, 질서 정연함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성직자는 내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친구들이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로 놀리는 소리를 들으며 디덜러스라는 자신의 이름이 다이달로스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장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고 갑자기 자신의 숙명은 예술가임을 느끼며 전율하는 장면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의 하느님의 종이나 다름없이 신실하게 살아가던 스티븐이 영원히 성직자로 살 생각을 하자 까마득해져 성직자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조금 급작스럽긴 하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까지는 납득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다이달로스라는 걸 알게 된 순간 갑자기 자신의 숙명이 예술가라는 걸 깨닫고 거의 환희를 느끼며 전율하는 장면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너무나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고 그전까지 꿈에 대한 갈등이나 창작에 대한 열정을 확연히 드러내지도 않던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장의 이름인 걸 알게 되자 그 이름을 따라서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는 건 생각의 회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지 해석이 되지 않았다. 뒤의 해설에서는 이피퍼니(Epiphany)를 설명하며 인간의 모든 위대한 결정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관점으로 이 부분을 해석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 해설을 듣고도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저 디덜러스라는 이름을 이용한 서사 완성을 위해 억지로 끼워 넣어진 장면 같았다.(애초에 숙명 따위가 있을 리가.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굳이 이름의 의미를 들먹이며 자신에게는 예술가의 길이라는 숙명이 주어져 있다는 얘기까지 굳이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초반부와 후반부는 좋았으나 중반부가 아쉬운 소설이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주인공의 생각의 흐름이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아쉬움은 내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다. 아직 조이스의 어렵고 난해한 작품에 담긴 수많은 의미들을 읽어낼 만큼 나의 지식수준이 높지 않기 때문에 이런 아쉬움이 찾아온 것이리라. 언젠가 조금 더 나이가 먹고, 조금 더 많은 것들이 머리에 든 상태에서 한 번 더 읽어보면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한 문장
나는 내가 더이상 믿지 않는 것은 그것이 설령 나의 가정이나 나의 조국이나 아니면 나의 교회라 할지라도 섬기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