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 원종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 책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제목만 보고 집어 든 책이다. 공대생으로써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이었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라니.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과 물리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고 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섞어놓은 제목만으로도 내 지갑을 열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 기대만큼이나 즐겁고 재미있게, 마치 놀이를 하듯이 순식간에 읽어버린 책이다.
이 책은 짧은 SF 소설 여덟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소설의 앞과 뒤에 각각 소설 속에 나오는 과학적 내용과 아이디어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 앞설과 뒷설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있다는 사실이다.(+저자의 농담과 유머도 함께 들어있다.) SF 소설 속에 나오는 과학적 내용에 대해 어려움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SF라는 장르에 입문하기에 아주 좋은 구성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SF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과학을 모르면 SF 소설을 읽을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해 말이다. 그러나 SF 소설을 실제로 몇 편 읽어본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스파이가 나오는 소설을 읽을 때 스파이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만 소설을 즐길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저자는 여러 가지 과학적 소재들을 서사와 엮어 풀어놓았다. 제목에 나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노화, 인공지능과 튜링 테스트, SF라면 빠질 수 없는 광속 우주선과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현대 과학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과제들이 이루어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미래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캐치해서 보여준다. 이번에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지만 SF 소설은 Science Fiction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음에도 흔히 생각하는 Science와는 거리가 먼 어떤 지점들을 건드린다. 무한한 삶이라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는가, 혹은 과학의 발전, 문명의 발전을 위해 인류가 아닌 종의 생명을 희생시켜도 되는가 등등. 세상의 작동 원리를 파악한다는 어찌 보면 순수하기까지 한 과학의 의미 자체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과 윤리와 가치 판단의 기준들을 꺼내 뒤흔든다. 현재는 맞닥뜨릴 일이 없는,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내려야 할 결단을 미리 경험하고 체험하도록 만든다.
과학계에 종사하고 있지만 가끔 잊어버린다. 과학이 사실 너무나 많은 것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과학은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윤리, 산업 전반에 걸쳐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이번 코로나 사태만 봐도 생명 과학 기술로 만들어진 키트 하나가 정치, 외교, 경제 곳곳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SF 소설은 바로 그 부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과학은 인간이 있는 이상 세상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순수한 학문으로써 남을 수 없다는 부분을 말이다. SF 소설에서 과학이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드러내는 소재로써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이유다.
이 소설집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앞설이다. 짧은 단편에서 마지막에 나타나는 반전은 커다란 재미이자 묘미인데 앞설에서 저자가 설명한 내용이 오히려 소설의 마지막 반전을 예상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차라리 앞설의 내용을 뒷설에 더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하나의 아쉬운 점을 제외하면 SF 초심자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좋은 SF 소설이다. 소설 속 과학에 대한 설명도 읽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어디 가서 튜링 테스트 얘기 나왔을 때 아는 척 하기 충분한 설명이 들어있다.) 가볍고 즐겁게, 또 과학에 대한 두려움을 깨고 SF에 입문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소설 속 한 문장
이상입니다. 나의 전례 없는 대규모 파괴 행위가 과연 저들이 자신들의 행성에 저지른 일과 다름없는 잔인한 범죄인지 아닌지는 현명한 집정관 여러분이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