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긴 커리어 여정에 뛰어든 주니어가 방향성을 잃지 않는 법
올해 초 이직을 했던 경험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야기는 먼저 이직을 하려했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아직 회사를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이직하나요?
작년 가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이직을 준비했습니다. 이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성장’이었습니다.
UX 디자이너로써 앞으로 일할 날들(족히 수십 년)을 떠올려 봤을 때, 장기적으로 이 시장에서 값어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나의 경쟁력이 될 수 있는 역량을 탄탄하게 쌓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래에 나는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지를 떠올려보고, 그 이상향에 가까워지려면 어떤 역량이 필요한지를 떠올렸고, 현재 회사에서는 그 역량을 채우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때문에 현재 회사에서 경력을 더 채운 뒤 이직하는 대신, 지금 바로 이직하기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경력은 초기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써의 경험이 7개월, 그다음 회사에서 리서처/PM으로 일한 경력이 1년을 조금 넘깁니다. 사실상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은 1년도 안된다고 보면 됩니다. 평범한 스타트업의 평균 수명을 고려해봤을 때, 한 회사를 경험하는 기간으로 1년이 적은 기간은 아니라 생각했지만(저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원티드를 아무리 뒤져봐도 3년 차 이하는 원하질 않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며,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은 경력이 부족한데 이번에 잘 입사했다며, 이런저런 소문들에 힘을 입어 '나만이 가진 장점을 충분히 잘 어필하면 길이 있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지원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늘 서탈이었습니다. 포트폴리오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직 준비 초기, 운 좋게 면접 기회가 생겼던 스타트업에서 정말 좋은 면접관님을 만났습니다. 면접 내내 받은 피드백, 매너, 앞으로 디자인 스쿼드를 어떻게 운영할 생각인지 등을 듣고 정말 그와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면접을 마치고 집 가는 길에 충분하지 않았던 면접 답변이 생각나 다시 답변을 정리해 문자로 보내드릴만큼 간절히 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디자인 리드님은 면접 결과와 별개로, 저에게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 포트폴리오 피드백을 주셨습니다(감사합니다ㅜ, 피드백 내용은 글 끝에 첨부합니다). 전반적인 기조는 면접에서 보였던 긍정적인 부분들이 포트폴리오에 잘 담겨있지 않은 것 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메일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ㅜ) 포트폴리오를 개선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포트폴리오를 개선해 나간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믿을 수 있는)에게 저의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고, 내용이 잘 읽히는지, 문제 해결 과정이 잘 보이는지 등을 확인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의 작업에만 매몰되면 시야가 좁아지고, 객관성을 잃기 마련입니다. 나는 당연히 인지하고 있는(전제로 하는) 내용이라 포트폴리오에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는데 제삼자의 눈에는 그 점이 구멍 난 것처럼 커넥션이 부족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과정을 통해 확인한 저의 또다른 부족한 점은 디자인적 요소였습니다.
포트폴리오 자체도 하나의 UX라는 말을 지겹게 들어봤을 것입니다. 저는 문제 해결, 데이터에만 너무 매몰된 나머지 너무 디자이너의 포폴같지 않단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계신 분이 있다면 디자인적 요소를 생각하는 것을 잊지 마세요. 보여주기식 디자인 요소가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런 약간의 디자인적 요소들이 면접관으로 하여금 ‘아 이 친구는 디자인도 할 줄 아는구나, 이건 디자이너 포폴이구나'라는 시각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셈이 됩니다.
포트폴리오 개선할 때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업무적이던, 업무적이지 않던) 상황에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피드백을 받다 보면 비슷비슷한 말들이 모아지는 것들도 있고, 전혀 다른 여러 의견을 듣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 ‘피드백을 (무조건) 반영해야 한다’라는 강박이 있다면 서로 다른 피드백 중 도대체 뭘 반영해야 하는지, 뭐가 정답인지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피드백은 무조건 반영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내 결과물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이기 때문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저 사람은 어떤 배경을 가졌기에 이런 답변을 했는지를 입체적으로 고민하며 받아들여야 표면적인 반응이 아닌 깊이 있는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 경험에 빗대어 조금 더 말씀드리면 커머스 스타트업 과제 전형을 준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 주변에는 각기 다른 커머스를 다니는 친구 두 명이 있었고, 각각에게 제 아이디어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두 친구는 제 아이디어에 대해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놨고, 두 친구의 실력을 모두 다 신뢰했던 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니 한 친구는 생필품 커머스, 한 친구는 패션 커머스에 다니기 때문에 유저의 행태나 서비스 성격이 달라 그런 것이라고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인사이트를 기반으로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인테리어 커머스 회사의 유저는 어떤 행태를 가지는지 본질적인 고민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수집한 피드백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솔루션에 녹여낼지는 본인의 판단입니다. 때문에 내가 어떤 문제에 어떤 방향으로 집중하고 접근할 것인지 나의 방향성에 맞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합니다.
위의 두 과정에서 포트폴리오를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운이 좋게 여러 탄탄한 스타트업의 경력 포지션에 서류 합격이 되어, 과제도 진행하고 면접도 진행했지만 늘 결과는 같았습니다. 면접을 통해 내 포트폴리오에 대한 피드백도 얻고, 이렇게 면접 데이터를 쌓아 다음 면접에는 더 잘하면 되지라고 정신승리도 했지만 가슴이 쓰린 건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직 초기에는 지금 회사에서 하루빨리 나가 스타트업에 가야겠다는 생각때문에 마구잡이로 지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쯤 한 개발자 친구가 해준 조언이 있었는데, 목표를 구체화해서 어딘가에 적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 친구가 최근 좋은 회사들을 합격하는 것을 보며, 속는셈치고 아이폰 메모 위젯에 ‘나는 내년 초에 직원수 300명 이상 규모의 IT 스타트업으로 이직한다'를 적어놓았습니다. 이걸 해놓는다고 내가 볼까 싶었는데, 핸드폰을 쓰며 꽤 많이 보았고, 아 나는 3월 안에 이직해야해! 라는 마음가짐 때문인지 좀 더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어놓았기 때문에 저 조건안에 드는 회사만 지원함으로써 마구잡이 식의 지원을 하지 않게되었고, 그로인해 좀 더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습니다.
그냥 무작정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노력에 비해 성과가 좋은 것 같지 않다면 객관적인 중간점검이 필요합니다. 이직을 준비한지 3-4개월차 쯤,,, 수많은 서류와 과제, 면접에 떨어지고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갔습니다. 이때 우연히 어떤 분의 취업준비 글을 읽고 아이디어를 얻어, 저의 지원이력을 노션에 데이터화 했습니다.
어느회사는 면접까지 갔고, 어느회사는 최종에서 떨어지고, 어느회사는 아예 서탈이고 도표로 적고 수치화 해보니 신입수준치고 꽤 굵직한 회사들의 경력모집 공고에서 좋은 소식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최종합격은 없었지만 이 과정에서 자존감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고, 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지금은 딱히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확인해 본 저의 문제는 유독 실무진 면접에서 탈락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분석해 보자면 경력직을 뽑는다는 것 자체가 지금 당장 최소한의 교육만으로 실무에 투입될 사람을 원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실무 경험을 묻는 질문에서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에이전시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준비했기 때문에 내부 데이터를 활용한 개선 질문 등에는 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이드 프로젝트에서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 답변했지만 당장 실무에 투입하기에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미친 성장이 트렌드인 한국 스타트업계에서 신입을 교육하고 성장하길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것도 맞을 것 같구요(제 정신 승리일 수도 있지만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렇게 상황을 조금 객관화해보면 내가 무엇이 부족하고, 그 부족한 것들 중에서 무엇은 내가 노력할 수 있는 것이고 무엇은 노력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러다보면 탈락에 아주 조금 의연해집니다.
당시 저에게는 이직이 너무 급한 이슈였고, 당장 오픈되는 공고들에 지원을 빨리 해야했어서 포트폴리오의 전반적인 룩앤필만 많이 다듬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었지만 시간이 충분하다면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프로젝트를 다시 구성할 것 같습니다.
여러 시니어들에게서 포트폴리오에 대해 피드백 받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내가 구성한 포트폴리오도 어쨌든 누군가가 봐주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프로젝트 자체에서 어떤 메시지를 던질것인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나 이것도 개선 했고, 이것도 개선했고, 이것도 보여주고 싶고… 하다보면 결국 보는 사람은 이 디자이너가 말하고 싶은게 뭔지, 그래서 어떤 개선을 한건지 헷갈릴 것 같습니다. 메시지가 간결해야 프로젝트를 기억하기도 쉽구요.
대부분 같은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포트폴리오를 볼테지만, 도메인이 다르면 몇몇 전문용어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해하더라도 한눈에 클리어하게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구요. 나는 전문가 처럼보여야지! 내 프로페셔널함을 보여줘야지! 하고 문장도 늘여 쓰고, 전문용어를 남발하게 되면 읽기 힘든 포폴이 됩니다.
내가 디자인한 결과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앞에 문제 발견과 정의 부분이 결과물에 비해 비대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게 이렇게 심각한 문제였어~ 봐바~~ 그래서 내가 이 디자인을 한거라니까? 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에 대한 해결이 타당한지는 디자인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디자인했다! 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그 디자인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앞서말한 문제를 충분히 해결했는지, 혹시 해결하지 못했다면 왜 그랬는 것 같은지 서술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포트폴리오 프로젝트를 구성할 때 논문구성을 조금 참고했는데, 논문 구성을 보면 서론(문제) → 본론(문제) → 연구 방법 → 연구 내용 → 결과 → 아쉬운 점, 혹은 시사하는 점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UX실무는 이렇게 계속 가설을 검증하고 테스트하고, 검증하고 테스트하는 방식을 반복하기 때문에 논문 구성의 방식이 UX프로젝트를 서술하기 좋은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렇게 오래걸렸는진 모르겠지만 제 체감상 전 꽤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위에 적어놓았던 조건에 부합하는 회사에 경력직으로 합격할 수 있었고, 곧 3개월의 수습기간을 마치게 됩니다. 어딜가도 경력직만 뽑는다는 공고들 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일을 시작할 수 있는지, 어떻게 커리어를 준비하면 되는지 막막함도 많았고, 슬픔도 많았습니다. 마음도 많이 무너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직 준비를 하며 저를 도와준 제 주변의 좋은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새로운 멘토의 인연도 생겼습니다. 힘들때마다 이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래도 나쁘지 않은 삶이다 생각하고 버텼던 것 같습니다. 희망이 없는 것 같고, 난 쌩 신입인데 당장 3년차 이상부터 뽑는 공고들을 보며 나는 언제 3년이 되나 조급해지고, 사회에서 원하는 조건에 비해 부족함이 많아 지금 내 성장속도가 더디다고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꾸준히 나아가고 있고, 방향만 잘 잡혀있다면 희망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직 하나 하고 좀 거창한 것 같긴 하지만 저를 도와준 넥스터즈 친구들, 블랙, 영민언니, 윤진이, 학교동기 친구들, 그 외 모두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