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쓰다
2000년 11월부터 서울로 발령받아 아현동 언덕 위의 단칸방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2001년 12월 지방에 있던 가족이 서울로 이사 오기까지 아현동은 회사가 위치한 업무 공간이면서 주거공간이자 주말부부의 쓸쓸함을 달래줄 오락공간이 되었다.
2007년 6월 아현동 재개발 승인이 이뤄지고 그해 12월부터 시작되어 대부분 이주가 완료된 2008년 12월 1일 아현동 재개발 구역을 찾았다.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폐가로 변한 그곳에서 나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던 시기에 가족이 나누고 베풀고 이해하고 살았던 시절,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아껴 쓰고 절약할 줄 알았던 시절.
그렇지만 마음만은 부자였고 꿈과 희망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냈던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1년 남짓 지나면 이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건너집 다투는 소리도 사라지고, 열린 대문으로 흐르던 정도 사라지겠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처럼, 그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처럼 가난했지만 마음은 부요했고, 부족했지만 마음은 풍족했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1. 내 그림의 맑고 푸른 기억을 더듬다
서울에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공장, 아파트, 빼곡하게 늘어선 무채색의 건물들, 매연, 오염된 물, 아스팔트 도로.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표현되는 도시의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람들의 낯빛도 무채색처럼 퉁명하고 도시인의 삶도 흐린 날 먹구름처럼 칙칙하다.
나이가 들어 세상과 맞서면서 점점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내 모습에 놀라고, 세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주름과 흰머리에 거울을 보며 또 한번 놀란다.
나의 어릴 적 그림에는 검은색이나 회색처럼 칙칙한 색깔이 거의 없었다.
사람의 눈동자나 머리카락, 캄캄한 밤을 제외하고는 인물화든 풍경화든 검은색으로 칠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검은색의 무겁고 탁하고 칙칙한 느낌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기보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난 자연과 사물들은 검은 것보다는 화려하고 밝고 아름다운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파란색 하늘, 초록색 나무, 하얀색 구름과 소복이 쌓인 눈, 하얀 안개와 굴뚝에서 피어나는 하얀 연기.
빨간색 사루비아 꽃송이, 분홍색 봉숭아, 초록색 벼와 옥수수, 연보라 감자꽃과 푸르게 펼쳐진 논과 밭.
누런 송아지와 흰 삽살개, 발그레 물든 노을과 어머니의 하얀 저고리....
아현동, 사람들이 떠나고 텅 빈 집에서 아주 어릴 적 그리던 맑고 푸르던 세상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우리가 사는 오늘도 그와 같기를.
맑고 푸르고 화사하기를.
2. 가난하지만 꿈이 가득한, 비좁지만 온전한 삶의 공간이던 단칸방의 기억을 더듬다.
어릴 적 방 두 칸 집에 살았으면서도 방 한 칸을 자식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조건으로 초등학교 선생님께 월세 없이 살게 하셨다. 하루에 한 시간씩 과외를 받으면서 공부를 왜 하는지, 무엇이 되려고 공부하는지 생각도 없이 엄마가 시키니까 할 수 없이 건성건성 공부했다.
그렇게 옆방 하나를 남에게 주고 나서 우리 가족 다섯 명은 한방에서 생활했다.
동네 개구쟁이와 싸운 동생의 잠꼬대를 들으면서, 이빨을 갈고 코를 심하게 고는 아버지의 야윈 몸을 보면서, 가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머니의 눈물과 작게 흐느끼던 울음을 들으면서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투는 소리를 듣고도 자는 척해야 했고, 다 헤진 우리 옷을 보면서 한숨과 함께 푸념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문틈 사이로 들어야 했다.
새로 산 신발을 잊어버려 야단맞는 나로 인해 동생들까지 방 한쪽에서 떨어야 했고, 어머니 몰래 지갑에서 돈을 가져다가 사탕 사 먹은 것 들켜서 몇 시간 손을 들고 벌을 서야 했다.
그러면서도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었고, 가족 하나하나의 아픔이 무엇인지 헤아렸다.
아버지의 한숨이 무엇 때문인지도 어렴풋이 알았고,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제일 불쌍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게 함께 살고, 함께 느끼고, 함께 울고 웃는 딱 네 평의 공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 오가고 배려가 쌓이고 꿈이 넘치는 곳.
유년의 시절 가난했지만 꿈이 가득하고 비좁지만 온전한 삶의 공간이던, 가족이란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던 단칸방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
3. 남루한 옷가지를 빨아 널며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기억을 더듬다
두 살 차이 나는 동생은 언제나 나의 옷을 되물려 입었고 그런 동생은 새 옷은 형만 준다고 늘 징징거렸다.
이른 봄날 얼음이 녹아 질펀해진 골목에서 자치기며 딱지치기 술래잡기를 하다 보면 옷은 금방 지저분했고, 어머니는 하루에 세 번씩 빨래를 하셨다.
우물 아래 작은 도랑에서 바위에 빨래를 얹고 뽀얀 색깔로 돌아올 때까지 방망이로 두드리고, 하얀 광목이나 속옷을 솥에 넣고 팔팔 삶기도 하셨다.
그렇게 온몸으로 정성 들인 빨래는 마당 한편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널리고 빨래집게로 고정하면 햇살이 옷의 피부를 두드리고 바람이 옷의 속살을 만지고 앞마당 꽃향기가 옷을 구석구석 타고 흘러 엄마를 닮은 옷, 엄마의 향기가 나는 새 옷이 되었다.
무릎이 달아 구멍이 난 바지와 닳고 닳아 헤진 신발의 내장이 훤히 들려다 보인다.
꿰어서 수술 흔적이 가득한 양말이 나풀거리고, 색 바랜 신발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구멍 나고 찢어지고 닳아서 남루해진 옷 가지에 어머니의 사랑이 닿으면 옷이 말끔해지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가위질 하나에 새 옷으로 변신했고 바느질에 상처들이 깜쪽같이 사라졌다.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렵고 가난하지만 빨래를 하며 자식이 잘 되기를, 사회와 국가에 쓸모 있는 일꾼이 되기를 기도하시던 그 간절한 기억을 더듬다.
4. 삶의 희로애락을 전하던 우편함의 기억을 더듬다
지금의 핸드폰은 생각조차 못하고 일반 유선전화는 있었지만 통화가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가장 일반적으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은 편지였고, 빠른 전달 수단은 전보였다.
외지에 나간 자식이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오겠다는 소식부터 시집 간 딸이 엄마를 그리워하는 그리움 가득한 편지, 멀리 타지에 일하러 간 남편이 사진 한 장과 함께 보내온 사랑의 편지.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걱정 말라며 자식에게 보내온 어머니의 눈물 젖은 편지, 군대 간 남자 친구로부터 사랑하니까 기다려달라는 애틋한 연애편지.
펜팔로 알게 된 이성의 사진과 함께 보내온 설렘 가득한 편지, 멀리 유학 간 자식으로부터 돈 보내달라는 간곡한 편지, 부족한 살림에 쌓여가는 고지서, 멀리 지방으로 시집간 누이가 보내온 소포 한 다발.
누구나 다 집배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배달된 편지를 읽으며 웃고 울고 했다.
세월이 변하며 우편함은 기능을 잃어갔다.
쓰는 사람의 정성이 담긴 편지는 컴퓨터에서 정형화된 서체로 작성한 이메일로 바뀌었고, 전보와 같은 통신수단은 휴대폰의 문자로 바뀌었다.
방송국에 전하는 사연은 SNS나 문자로 보내고 가족 간의 대화도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대신하게 되었다.
노트에 빼곡히 적어서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면서 고치고 하얀 편지지에 정성을 다해 편지를 썼던 마음, 봉투를 열며 어떤 내용이 있을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던 행복한 마음.
인터넷 홈쇼핑으로 택배는 늘었지만 마음으로 주고받는, 기다림이 있고 설렘이 있는 편지가 사라지면서 가족의 관심을 잃은 우편함은 빨간 녹과 함께 늙어갔다.
내 유년의 시절 희로애락을 함께 한 우편함의 기억을 더듬다.
5. 그렇게 갖고 싶었던 장난감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
늘 부족하고 가난했던 시절,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살림살이에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기란 불가능했다.
아주 사소한 것, 친구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것도 살 수 없을 만큼 가정 형편이 어려운 친구도 많았고 학교에 도시락 조차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옷은 닳아서 구멍이 나면 몇 번씩 바느질을 해서 깁었고, 형이나 언니가 입었던 옷을 대물림해서 입었다.
밭이 대부분인 산촌에는 쌀 밥 먹는 친구들이 몇 없었고 보리나 옥수수로 만든 밥을 먹고 밭이나 산에서 얻는 것으로 만든 반찬을 먹었다.
그렇게 살기가 녹녹지 않았던 시절에 자동차 모형, 로봇 장난감은 거의 없었으며 하얀 운동화를 신은 친구들도 몇 없었다. 자전거가 귀하던 시절, 친구가 타는 자전거를 부러운 듯 바라보았고 겨울철 꽁꽁 얼려진 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친구들을 마냥 부러워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중학생이 신어도 딱 맞을 정도로 커다란 스케이트를 사 오셨다. 친구들이 타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사탕 몇 개를 주고 잠시 신어본 스케이트, 그 꿈의 스케이트를 받은 날 새벽부터 강에 나가서 이리저리 부딪혀서 멍이 시퍼렇게 들면서도 얼음 위를 달렸다. 내 발에 양말 몇 개를 겹쳐 신고 스케이트 안에 신문지를 한 움큼 말아 넣어야 하는 아주 불편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것 하나가 주는 행복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스케이트나 자전거, 인형이나 장난감이 흔해지고 먹고 싶은 것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러면 더 행복하고 감사한 일들이 많아야 하는데 여전히 물질을 탐하고 물질을 섬기며 살아간다.
아주 작은 것에 대한 감사가 점점 사라지고 더 많이 내 소유로 만들기 위해 욕심을 부리고 죄를 짓는 세상이 되었다.
그 누군가가 버리고 떠난 인형, 장난감, 바람 빠지고 녹이 슨 자전거와 덩그러니 지붕을 지키고 있는 운동화 한 짝에서 가난했지만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그 시절을 더듬다.
6. 담을 것도 쌓을 것도 먹을 것도 많지 않던 그 시절을 더듬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옻칠이 다 벗겨진 서랍장 하나와 반찬이나 그릇을 얹어 놓는 그릇 보관장이 하나 있었다. 방 한구석 옻칠이 벗겨진 서랍장에는 우리 가족 5명의 옷을 넣어서 보관했는데 옷이 많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작은 공간에 5명의 옷을 보관했다니 신기할 나름이었다.
서랍장의 꼭대기는 계절이 지난 이불을 보자기에 싸서 얹고 그 위에 덮고 자는 이불과 베개를 얹어서 보관했다.
한겨울 아랫목에는 이불 하나를 깔아서 찬 공기에 방바닥이 쉬이 식지 않도록 했고 아침, 저녁으로 나무를 때면서 만든 숯불을 담은 화로를 방안에 두어 따뜻한 훈기가 지속되도록 했다.
부엌은 불을 때는 아궁이가 두 곳 있었는데 아궁이 위에는 커다란 가마 하나와 무쇠 솥이 걸려 있었고 나무를 때면서 나오는 연기와 그을음으로 천정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몇 개 안 되는 식기들과 고추장, 된장, 간장처럼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는 장류와 설탕이나 당원처럼 달달한 것들은 부엌의 장식장에 넣어 두셨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그 단맛에 유혹되어 어머니 몰래 설탕을 꺼내서 물에 타 먹고 산딸기나 오디에 뿌려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했던 시절, 한두 사람의 옷을 보관하기에도 작아 보이는 서랍장에는 다섯 가족의 옷을 보관했고, 그릇 몇 개 넣고 반찬 한두 가지 넣으면 꽉 찰 것 같은 장식장에도 다섯 명의 식기와 반찬을 보관했다.
오늘날 냉장고, 김치냉장고 그리고 싱크대의 수많은 수납공간, 장롱이나 서랍장, 붙박이장, 옷장 등 옷이나 이불을 보관하는 공간이 많아졌지만 가족수는 적어졌는데 여전히 비좁고 짐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것 하나도 수차례 고민해서 구매하고, 새로 산 것은 부서지거나 그 기능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아껴서 잘 사용하는 우리 어머니들의 지혜가 오늘날 우리를, 대한민국을 만들었음에 감사드린다.
담을 것도 쌓을 것도 먹을 것도 많지 않던 시절에 우리 가족의 꿈과 사랑을 담았던 서랍장이며 그릇보관장의 소중한 기억을 더듬다.
7. 화분에 물을 주며 자식에게 사랑을 주어 자라게 한 기억을 더듬다
어머니는 마당 한켠에 꽃을 심으셨다.
키가 낮은 봉숭아, 채송화, 사루비아와 같은 꽃을 앞쪽에 심으시고 뒤편에 백일홍을 심고 키가 큰 해바라기도 몇 개 심으셨다.
마당 옆 밭 한쪽에는 더덕을 심어 그 향기가 여름철 마당에 그윽이 내려앉았고 흰색, 보라색 도라지를 심어서 가을날 도라지 무침을 만들어 주셨다.
앞마당에 낙엽이 쌓일까, 잡초가 자랄까 빗자루로 쓸고 호미로 잡풀을 뽑고 김을 매고 계셨다.
가뭄이 들 때면 옆 우물에서 물을 길어 꽃이며 농작물에 물을 주었고 비가 오면 커다란 물통에 물을 받아서 오가며 자식 같은 식물들에게 사랑을 담아 뿌려주셨다.
어느 정도 자식들이 크고 다 외지로 나가서 적적해진 마음, 외로운 마음을 달래려 집에 화분을 여러 개 두시고 닦아주고 매만지고 물을 주어 자식처럼 보살피셨다.
우리들의 부모가 그랬듯이 아버지는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셨지만 어머니는 일하시는 틈새에 꽃을 가꾸고 채소나 곡식을 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정성스럽게 가꾸셨다.
식물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면 꽃으로 열매로 보답을 하는데 부모의 사랑을 정말 많이 받고 자란 우리는 그 조건 없는 사랑을 잊고 살 때가 많다.
화초에 물을 주고 예쁘게 성장하기를 바라듯 자식에게 밥을 해 주시면서 자식이 훌륭하고 든든하게 성장하기를 바라셨고, 감자나 옥수수 밭에 김을 매시면서 이것을 먹고 건강하고 기쁘게 성장하기를 기도하셨을 것이다.
마당을 쓸면서 자식에게 어려움을 이기고 성공하기를, 가을 추수한 곡식을 비닐에 담으며 더 좋은 것으로 입히고 더 맛있는 것으로 먹이지 못했다고 미안해하셨을 것이다.
아프지 않다고, 괜찮다고, 내 걱정을 말고 너희들 걱정이나 하라고 하시지만 그 마음 한구석에 상처가 나서 아프고 쓰렸을 것이다.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부모님의 기억과 우리를 위해, 우리의 꿈을 위해 씨앗을 심고, 물을 주시고 김을 매주신 사랑의 기억을 더듬다.
8. 소유의 경계,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베풀고 나누던 기억을 더듬다.
어릴 적에는 어느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이 우리 집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
앞집 할아버지 생신에는 떡과 소고깃국 한솥과 과일을 몇 개 담아 보내왔고, 멀리 서울에서 일하는 아들이 집에 다녀간 날에는 전이며 떡 같은 음식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건너집 형 장가가는 날에는 내 아들 장가보내는 것처럼 이웃들이 모여 결혼식에 동네에서 먹을 음식을 준비했고, 넉넉한 인심은 동네 주민 모두에게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길을 가다가 떡메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영희가 떡을 가지고 우리 집에 왔고, 어머니는 떡 그룻에 감자며 고구마를 담아서 보내셨다.
우리 집 대문은 늘 열려있었다. 윗동네 사는 한씨 아저씨가 목마를 때 부엌에 가서 물을 마셨고, 우리 집 허락도 없이 써레질을 할 사용하는 쟁기를 뒷간에서 가지고 갔다.
조금씩 경제발전의 결과로 삶이 나아지면서 집과 집 사이에 담장이라는 경계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것을 보호한다는 생각, 내 생활을 보호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저 마다 담장을 만들고 철대문을 달았다.
담장에 뾰족한 병을 세워서 도둑의 침입을 막았고, 창문에는 쇠로 만든 방범창을 설치했다.
출입문은 자물쇠를 달아 예전처럼 자유로운 왕래가 어려워졌으며, 담장을 넘어온 옆집 살구나무의 살구도, 학교 가는 길 밭에 가득했던 무도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남들보다 경제적인 부를 가져야 하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하고, 넓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잘 사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마음의 경계가 생기기 시작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군림하는 자와 군림을 당하는 자,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의 지배를 받는 자 사이에 넘지 못할 경계, 마음의 벽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현동은 골목을 사이로 주택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한 집에 여러 가족이 살았고, 옆집의 싸우는 소리, 삼겹살 굽는 냄새, 앞집 마당에 못 보던 새 옷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담장은 있었지만 형식에 지나지 않았고, 그 형식의 담장은 마음의 담장, 마음의 경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고양이가 인간을 경계하는 그런 숨 막히는 경계는 없었다.
소유의 경계, 마음의 경계 없이 서로의 삶과 가진 것을 나누는 그 시절 아현동의 기억을 더듬다.
9. 다른 공간이지만 같은 공간처럼 이웃하며 사는 삶의 기억을 더듬다
아현동 재개발구역, 대부분 이사 가고 몇 집 남지 않은 골목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재개발이 안되었더라면 그냥 예전처럼 살았으면 더 좋았겠다고 말씀하시며, 이곳에 살던 분들 중 대부분은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에 살지 못하고 또 다른 터전으로 이사해야 한다고 하셨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그 집의 개는 몇 살인지, 밥그릇은 몇 개나 되는지 다 알고 있을 만큼 친하게 지냈던 이웃들과 떨어져서 사는 아쉬움이 툭 뱉는 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년시절 친구 집은 같은 대문을 사용하는 집이 나란히 두 채가 있었는데 마당이며 우물물이며 빨랫줄이며 재래식 화장실까지 같이 사용했다.
서로 다른 집 아이들의 생일이며 좋아하는 음식이며 특이한 버릇까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이웃과 소통하고 나누며 살았다.
옆집 어제저녁 반찬에는 고등어가 있었고 오늘 아침에는 싱싱한 계란찜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고, 옆집의 제사 날짜까지 알 수 있었다.
거주하는 공간은 분리가 되어 있었지만 생각의 공간, 마음의 공간은 늘 이웃과 함께 했고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집에 방문하는 것이 흉이 아니던 시절, 저녁시간에 방문하면 자기 집의 음식이 아무리 초라해도 함께 밥상을 나누고, 아무리 늦은 시간에 도움을 요청해도 흉이 되지 않던 시절.
내 것과 네 것은 있지만 네 것을 내 것처럼 사용해도 다 이해하고 내가 많은 것을 나누고 네가 많은 것을 베풀며 끈끈한 사랑의 공동체로 다른 공간이지만 같은 공간처럼 이웃하며 살았다.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분리된 다른 공간이지만 합쳐진 같은 공간처럼 살았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더듬다.
10. 부유함과 가난함의 기준을 더듬다
유년시절 부유함과 가난함의 기준은 밥과 반찬, 옷과 신발, 장난감과 텔레비전과 전화였다.
그리고 맛있는 과자와 과일이 얼마나 많이 자주 먹느냐였다.
산골에서 자란 나는 쌀밥을 먹지 못했다. 밭농사가 대부분이 산촌에서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쌀을 먹을 만큼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보리쌀에 감자를 넣고 밥을 짓거나 가끔 찰옥수수를 갈아 넣어 밥을 짓곤 했었다. 보리쌀은 찰기가 없어서 늘 푸석푸석했고 밥을 먹고 돌아서면 금방 배가 고팠다.
그런 우리에게도 쌀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있었는데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과 조상의 제삿날이면 눈치 안 볼 정도로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삼양라면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가격이 비쌀 때는 라면 하나에 국수를 가득 넣어서 끓여 먹었고, 아버지가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시고 사 오신 바나나 몇 개를 시커멓게 변할 때까지 아껴서 먹었었다.
계란말이, 햄, 소시지 반찬은 부자의 상징이었고, 구멍가게에서 파는 사탕이며 과자를 실컷 먹을 수 있는 것도 부자의 상징이었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친구들과 달리 하얀 운동화를 신고 다니며 자랑하던 그 시절, 다 떨어져 가는 옷을 형으로부터 언니로부터 물려 입었는데 서울에서 사 왔다는 새 옷을 입고 나타난 영희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며 우리가 자주 볼 수 없었던 장난감을 가지고 동네 놀이터에 나오면 만져보고 싶은 친구들의 줄이 이어졌다.
텔레비전이 동네에 처음 들어오던 날, 김 일의 박치기 한방에 환호성을 질렀고, 여로라는 연속극에 가족 모두의 눈망울이 붉어지기도 했었다.
밥과 반찬, 옷과 신발, 장난감과 텔레비전이 아버지의 부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었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잘 사는 것이지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게 싸우고 맛있는 것은 나누고 살았다.
대부분이 어렵게 살던 시절, 부모가 쌀집, 식료품점, 철물점, 사진관, 중국집, 신발가게 사장이면 나름 잘 사는 집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인 풍요라는 것을 알았다.
과거의 부와 가난함의 기준이 돈과 물질에 있지 않고 나누고 베풀고 함께 살아감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으며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부유함과 가난함의 기억을 더듬는다.
아현동 재개발구역은 1980년대 고도의 경제성장의 어두운 뒷골목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가 살았고 내 어릴 적 기억의 놀이터가 되던 곳.
돈 많은 사람은 강남으로 일산으로, 분당으로 떠났고 돈 없고 힘없고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현동 산기슭으로 모여들었다.
삶은 가난했지만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고, 물질은 부족했지만 사랑은 넘쳐흘렀던 그 아름다운 기억이 재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사라졌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꿈도 사라졌다.
그래서 아현동 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은 쓰리고 아프다.
마음 한구석이 휑하다.
(2008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