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여행인가 고행인가
들뜬 마음으로 여행을 온 건데 왠지 힘들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밤이 되고 아기를 재웠다. 이제 좀 쉬어볼까 싶은데 주체할 수 없는 피곤함이 몰려온다. 자야겠다. 놀러 왔는데 놀지를 못하는 이것은 바로 아기와의 여행…
아기가 몇 살쯤 되면 같이 여행 가기 좋을까요?
나도 궁금한 질문이다. 누군가는 돌 지나면 다니기 좋다고 했고, 누군가는 오히려 아기가 어려 누워만 있을 때가 더 수월하다고 했다.
우리는 아기가 200일, 300일, 400일 무렵일 때 여행을 다녀왔고 횟수로 따지면 총 5번 정도인데, 중요한 사실은 언제가 됐건 똑같이 힘들고 똑같이 고됐다. 그래서 아기와 여행 가기 좋은 시기에 정해진 답 같은 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기의 시기 별 특징 상 이런 건 편했고, 이건 불편했다 하는 부분들은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아기와의 지난 여행 썰들을 풀어보겠다.
첫 번째 여행이자, 아이의 200일 기념 여행이었다. 코로나도 코로나였지만, 추워서 아이를 데리고 돌아다닐 상황이 못됐기 때문에 숙소에만 머물다 왔다. 한적한 마을의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는데, 그곳에서는 바베큐와 불멍이 가능하다고 했다. 감히 고기는 구울 엄두가 안 나서 바베큐는 못했지만, 육퇴 후 불멍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사전에 장작만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를 재운 뒤 두툼한 외투를 입고 맥주를 챙겨 바깥으로 나갔다. 불을 피우고 이제 좀 즐겨볼까 하니 애가 깼다. 다시 재우고 나갔더니 또 깼다. 거짓말 좀 보태 이걸 몇십 번(?) 반복하니까 그냥 포기하는 게 빠르겠다 싶었다. 결국 맥주 몇 모금 마시고 바로 잠들었다. 그런데 아이는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새벽에도 계속 울며 깨어났다.
200일 무렵의 아이는 무게 중심을 잘 못 잡아서 앉아있다가도 뒤로 넘어지곤 했는데, 우리가 머물던 숙소 바닥은 딱딱한 대리석이었다. 아마 장판이나 매트가 깔려있는 곳이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때는 아이가 이유식과 분유를 같이 먹던 시기라서 이래저래 챙길 짐이 많아 번거로웠다.
사실상 불편함과 피곤함이 더 많은 여행이었지만 공기 좋은 곳에서의 하룻밤은 모처럼 엄마 아빠의 기분전환에 나름 유용했고, 집 앞으로 놀러 오는 고양이를 아이가 너무 좋아해서 아기와 고양이의 귀여운 조합을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200일 이후 몇 달만에 다시 여행을 계획했다. 지난 여행에서의 경험을 교훈 삼아 숙소를 고를 때 아이가 최대한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을 찾다 보니, 아파트 형태로 된 숙소가 가장 좋겠다 싶었다.
300일 무렵의 아이는 기어 다니고 잡고 일어서며,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만지는 등 저지레를 일삼았기 때문에, 혹시나 숙소에 장식된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지고 망가트리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최대한 깔끔한 곳 위주로 찾았다.
이번 숙소도 에어비앤비를 택했다. 바닷가에 잠깐 다녀온 걸 빼면 숙소에서 계속 시간을 보냈는데, 베란다로 보이는 바다 뷰는 완벽한 힐링이었다. 창문을 열면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동이 터오기 전 새벽 바다에는 조업 중인 배들이 보였는데, 그 불빛들도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아이도 이곳이 맘에 들었는지 밤에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쭉 통잠을 잤다. 어떻게 집에서보다 잘 잘 수 있었던 건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아무튼 낯선 곳에서도 잘 자는 아이를 보니 이제 여행을 데리고 다녀도 되겠다는 작은 희망을 보았다. (감격)
강릉에 왔으니 커피는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아서 근처 카페를 찾았다. 아침 오픈 시간에 맞춰 간 덕에 내부는 한산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커피 한 잔 마실 여유 같은 건 주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떡뻥을 여기저기 흩뿌려놓고, 테이블 위로 올라오려고 하고, 이것 저것 만지려고 바등바등거려서 카페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남편과 아이를 먼저 내보내고 나는 바닥에 흘린 떡뻥 부스러기들을 쓸어 담고 나왔다. 아무래도 카페는 아직 때가 아닌가 보다.
시누이가 미리 예약해둔 독채 리조트가 있다고 우리를 초대해줘서 감사하게도 함께 다녀왔던 여행이다. 성인 6명에 유아 2명이 머무를 수 있었던 큼지막한 숙소였다.
리조트는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정말 좋았다. 내부 부지가 넓어서 조용하게 산책할 수 있는 길도 많았고, 양과 사슴이 사는 목장도 있었는데 먹이 주는 체험도 가능해서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아침에는 조식을 먹으러 갔더니, 유아 식기나 아기 식탁 의자 등이 구비되어 있어서 밥 먹이기도 편리했다. (편리했는데 우리 아이는 왜인지 울기 시작해서 못 먹고 나왔다…)
6월의 고성은 라벤더가 한창 피어있는 시기라고 하기에 라벤더 구경도 갔지만, 종횡무진 걸어 다니는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바빴고, 유모차를 태워서 돌아다니자니 유모차가 다니기 좋은 길이 아니라 힘들었다. 이런 곳은 조금 더 커서 꽃을 즐길 줄 아는 나이가 되면(?) 놀러 오는 게 좋겠다.
항상 셋이서만 여행을 다니다가 이번에는 시댁 식구들과 다 같이 있어보니 일단 아이를 봐주는 손이 여럿 있고, 아이보다 한 살 많은 조카가 있어서 아기 용품을 나눠 쓰거나 밥을 같이 먹는 등 여행 중에도 공동육아가 가능한 점이 굉장히 편했다.
그새 아이는 쑥쑥 자라서 뽈뽈거리며 걸어 다니고, 바닷물에도 들어가 놀 줄 알게 됐다. 신나게 노는 아이를 보니 여행 온 보람은 물론 그간의 힘듦이 잠시나마 사라진다. 게다가 평일이라 카페에서 커피도 마실 수 있었다. 여유로운 커피 한 잔은 사치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커피가 입으로 들어갈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이가 14개월쯤 되니 확실히 같이 여행 다니기 편해진 부분들이 있다. 분유를 끊으니 자연스레 짐이 줄고, 밥도 햇반에 인스턴트 카레 같은걸 챙겨 가서 비벼 먹이면 한 끼가 간단히 해결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간 우리는 욕조를 챙겨 다니며 아이의 목욕을 시켰는데, 이제는 서있는 상태에서 샤워기로 씻기는 게 가능해지니 그 또한 꽤 편리하다.
또, 낮잠을 2번 자는 날도 있으나 1번 자고도 잘 버티며 놀기 때문에 낮잠 때문에 이동이나 활동에 제약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얼추 통잠을 자는 월령이 되다 보니 새로운 곳을 낯설어하긴 해도 밤잠을 잘 자는 편이다.
하지만 어딘가 놀러 가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노는 건 아직 조금 힘들다. 좋은 것, 예쁜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도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나 돌멩이에 관심이 더 많다. 그리고 잘 걷기는 하지만 잘 넘어지는 터라 계속 쫓아다녀야 하니 엄마 아빠는 체력적으로 바쁘고 힘들다.
얼마 전에는 남편의 직장이 연계된 숙소가 있기도 하고, 갯벌 체험을 해보고 싶어서 태안을 찾았다. 사실 말이 갯벌 체험이지 아이는 진흙을 퍼먹고 바닷물 찍어먹는 체험에 무아지경이었다. 그래도 물속에서 노는 게 재밌는지 그렇게 한참을 놀았다. 집에서는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밖에만 나오면 빠르게도 잘 간다. 그래서 힘들어도 자꾸 바깥을 찾게 되고, 여행을 가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여행 중 바닷가에서 소라 껍데기를 하나 주어다가 이걸 귀에 대면 바닷소리가 난다고 아이에게 알려줬었는데, 며칠 전 아이가 장난감 틈바구니에서 소라 껍데기를 꺼내더니 귀에 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듯해도 어쩌면 아이는 우리가 하는 행동과 말을 생각보다 더 유심히 보고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의 순간들이 쌓여 그것들이 알게 모르게 아이의 경험을 만들고, 이제 막 발을 내디딘 아이의 세상을 시나브로 넓혀주는 시작이 되면 좋겠다.
한창 바깥 활동을 좋아하는 아이인데, 야속하게도 코로나가 다시 대유행이 시작됐다. 문을 가리키며 나가자고 우는 아이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마스크를 씌울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왠지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길고도 힘들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