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에게도 새로운 인연은 찾아오겠지
도대체 육아는 왜 이렇게 고독한지 모르겠다. 아이가 어릴 때는 집에 콕 박혀 대화가 단절된 삶을 사는 게 고독했다면, 아이가 제법 인간다워진 레벨에 이르러서야 조금은 여유가 생겨 주변을 둘러보니 나 빼고 모든 게 변해버린 느낌이다. 친구들이랑 시시콜콜 카톡을 나누고, 주말에 같이 맛있는 거 먹고, 커피나 술을 곁들여 실컷 수다 떠는 게 거의 취미생활이었던 나는, 애 엄마가 되니 자연스레 친구들을 만나는 빈도수도 줄어들었고, 모처럼 약속을 잡아 오랜만에 만나고 나면 우리의 거리가 차츰 더 멀어진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돌아오는 과정 같아서 더 외로워지기도 했다.
같이 육아를 하는 친구들은 그나마 나았다. 같은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고, 아이를 동반해서 만나는 모임은 우리의 우정을 이어가는 더할 나위 없이 최적화된 방법이었다. 그런데 미혼인 친구나, 아이가 없는 친구를 만나면 거리를 좁히기 어려웠다. 출산 이후 내 삶의 주제들은 전부 육아로 가득 차버렸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과연 환영받는 이야기일지 내심 두려워 내 이야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절반으로 줄이다 보니 나와 동떨어진 삶의 이야기들을 듣고, 그녀들의 치열한 직장생활 이야기들을 듣노라면, 내가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의 상상들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됐다. 그 의미 없는 가정들은 괜한 고독을 더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친구들과의 연락이 줄어들고, 만나자는 이야기도 차츰 넣어두게 되며 마치 인간관계의 단절이 찾아오는 듯했다. 그렇게 내 삶에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이었거늘, 친구는 무엇이며 인간관계는 어떻게 유지해 나가는 것일까 고민을 거듭해나가는 인간관계의 과도기 같은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육아로 인해 찾아온 외로움은 육아에서 채워 넣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지 나의 육아에는 인연의 끈이 잘 생겨나지 않았다. 코로나 베이비를 출산한 탓에 조리원 동기도 없었고, 동네에서 같이 공동육아할 친구를 구하려고 아등바등했었는데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기관에 가면 친구가 좀 생기려나 싶었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공원을 가더라도 가족단위로 삼삼오오 모여 노는 사람들, 맘친구들끼리 키즈카페를 대관해서 파티를 한다는 이야기들은 다 남 얘기인가 보다. 일정 없는 주말에 놀이터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거나, 뜻이 맞아서 가족끼리 같이 캠핑도 가고, 캠핑이 아니더라도 어울릴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해 왔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이번 달은 유치원 하반기 학부모 상담주간이 있었다. 요즘 들어 아이가 유치원을 거부하는 일이 잦아졌는데, 엄마의 촉으로 추측하기로는 친구 관계가 원인이 아닌가 싶었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의 같은 반 원아는 총 9명으로, 남아 4 여아 5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고, 오후 시간에는 형님반과 통합된 방과 후 반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이는 주로 남자친구들이랑 어울리는 편인데, 아이를 제외한 동갑내기 남자친구들은 단 3명뿐이다. 그중 학기 초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 A가 있었으나, 어느 날부터 A가 자신과 놀지 않고 B랑만 논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에게 다른 친구들이랑 놀면 된다고, 꼭 A와 놀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아이가 원하는 해결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시점부터였던 것 같다. 매일 하원길에 오늘은 뭐가 재밌었니, 오늘은 누구랑 놀이했니 하고 물으면 혼자 놀았다고 대답하는 일이 많아졌다. 아이들 노는 게 얼마나 대단히 넓고 깊겠냐마는 은근하게 신경이 쓰이던 부분 중 하나였다. 사립 유치원보다 원아수가 적은 병설 유치원에 보낸 탓에 내가 아이의 교류 기회를 제한한 건 아닐까, 친구가 더 많은 사립 유치원에 갔더라면 결이 맞는 친구를 만날 확률도 늘어났을 텐데, 그러면 더 유치원을 즐겁게 다닐 수 있었을까, 매일같이 원복을 입고 스케줄대로 나열된 프로그램들은 아이가 자유롭게 놀이할 시간이 적어질 것만 같아서, 아이의 성향과 맞지 않을 거라고 의심의 여지없이 선택한 유치원인데, 내가 잘못 선택한 것만 같은 어딘가 찝찝한 기분도 들었다.
유치원 상담 날, 최근 아이의 등원 거부를 알고 염려하시던 선생님과 자연스럽게 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학기 초 아이와 특히 잘 어울려 놀던 A라는 친구가 어느 날부터 B와 같이 노는 일이 잦아졌다고.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A와 B는 캐미가 아주 잘 맞는 편인데, 그 사이로 우리 아이가 자연스럽게 함께 놀면 가장 좋겠지만, 아이는 그 무리에 잘 끼지 못하고 있고, A와 B가 아이를 놀이에 끼워주기를 거부할 때면 그것이 악의가 아닐지언정 놀이에 거절당한 아이는 속상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단짝의 개념이 없어서 서로의 욕구에 의해 친구가 되고, 지금 잘 놀았다고 한들 내년에도 잘 논다는 보장이 없는 관계니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하셨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르쳐야 하는 건, 어떤 집단에서든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으면 혼자 놀거나 다른 친구를 찾아서 놀거나, 다른 대안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었는데, 외동으로 자라는 우리 아이는 그 연습이 필요하다고 덧붙이셨다.
“어머님, 유치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친구가 어떤 친구인 줄 아세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고 무아지경으로 신나게 노는 친구예요. 그러다 보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궁금해서 붙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아이에게 혼자 놀아도 괜찮으니 신나게만 놀고 오라고, 원하는 놀잇감이 있으면 선생님한테 요청해도 되니까 재밌게만 놀고 오라고 해주세요!”
상담이 끝나고 혹여나 유치원에서 외로움을 겼었을지도 모를 아이의 뒷모습을 보니, 그게 왠지 내 모습 같기도 하고 어쩐지 짠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사회성을 연습하는 과정이려니 생각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 또 다른 친구들을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다른 유치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 말하라고 엄마는 항상 네 편이라고 말해주니 아이는 씨익 웃었다.
나라고 한들, 나의 의견을 거부당해도 ’괜찮은‘ 그런 건강한 멘탈을 가진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너를 그런 사람으로 자라게 만들 수 있을까. 엄마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런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치열한 유치원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주고, 수고한 너를 다독여주는 일일 테다.
인생 5년 차가 친구를 고민하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이를 텐데, 인간관계로 인한 나의 고민이 아이에게 투영되어, 결국 네가 아닌 나의 인간관계에 대한 걱정이었겠다. 친구들 무리 속에서 혼자 블록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을 네 모습은, 사회에서 멋있게 성장하고 있는 내 친구들 사이에서 육아라는 섬에 홀로 동떨어져있는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들과 갈등을 빚으며 상처도 받고 상처도 줬지만, 때로는 그들에게 구원받기도, 살아갈 힘을 받기도, 그리고 사는 게 더 재밌어지기도, 삶이 윤택해지기도 했기에, 아이 역시 네 삶과 일상을 더 즐겁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좋은 친구를 만났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이 괜한 걱정을 불러왔나 보다.
아무리 공동 육아의 친구를 만드려고 노력해도, 결국 친구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게 아닌 스스로 찾아가는 것임을 안다. 앞으로 네가 만들어갈 너의 인간관계, 그리고 너로 인해 새롭게 만들어질 우리의 인간관계가 좋은 인연들로 가득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더 재미나게 놀아보자. 그리고 느슨한 과도기를 겪고 어쩌면 더 단단해질 나의 인간관계에도 응원을 보내야겠다. 그저 우리는 좋은 인연을 맞이할 수 있도록 건강한 마음을 준해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