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지만 싱글은 아닌

2. LA

by 무기명

2017. 2. 9.


고백의 D-DAY이자 D+1을 맞이하는 날이다. 한 사람과 달력에 특별한 날을 새겼다. 2월 9일은 이제 잊어서는 안 되는 기념일이 되었다. 잊으면 큰일 나는. 그렇게 4년이 지났고, 인연은 현재진행형이다. 365일 중 350일을 만난다고 할 만큼 거의 매일 봤다. 누군가를 본다는 건 동시에 누군가를 못 봄을 내포한다. 생일, 동아리 등 외부적인 활동이 있는 날에만 친구들을 봤다. 누군가를 만나기 좋아했던 E 성향이지만, 그녀에게만큼은 I 였다. 친구들을 보는 것보다 그녀를 만나는 게 우선순위였으니까.

이제 그녀는 한국에 없다. 피부를 맞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24시간 중 최소 1/4을 함께했었다. 이젠 그 6시간이라는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 지금까지 없었던 나를 위한 시간. 사람들은 이를 자유시간이라 부른다.


2021. 5. 7.


회사에 연차를 냈다. 일일 보험을 든 차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출근했다. 이삿짐센터의 일일 알바의 마음가짐. LA로 떠나기 전 마지막 정리가 필요했다. 정리하기 위해선 내가 필요했고.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전신 거울은 뒷좌석에 놓았다. 그녀의 원룸을 채웠던 물건들은 당근마켓으로 팔았다. 당근마켓에 올라간 사진들이 영정사진처럼 느껴졌다. 이미 사용가치를 다해 방치되며 먼지를 쌓고 있는 그것들. 그녀는 일회용 물티슈로 N년치의 먼지를 훔친 뒤, 흰 벽지 앞에 전시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중 하나는 내 품에 안겼다. 전신 거울이 없어 내 방과 현관문 앞을 배회하던 누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부동산에 들러 계약을 끝내고 보증금을 돌려받았다. 이제 한국에 정착하고 있는 묵 돈은 주택청약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에 있더라도 한국 집값은 계속 오를 테니까.


출발하기 전 스시집을 갔다. 알찬 구성의 런치세트를 골랐다. 여자친구가 짜장면 대신 사는 밥이었다. 그녀가 서운할 만큼 밥이 잘 들어갔다. 평소보다 더 맛있게 먹었을 수도 있다. 오해하지 말아 달라. 아침부터 짐 옮기느라 고생했지 않나. 그래서 맛있었나 보다.

대용량의 아메리카노를 샀다. 평상시처럼 빨대는 2개였다. 테이크아웃 음료 한 잔에 빨대 두 개. 우린 가난한 대학생 시절을 함께했었다. 한정적인 용돈과 알바비로는 꽤나 활동적이었던 우리의 데이트를 지원하지 못했다. 빨대 2개는 우리 연애의 일부분을 보여준다. 바이러스 걱정 없는 마음으로 데이트한 시간이 더 긴 우리. 먹는 거엔 돈을 아끼지 않지만 커피는 나눠마셨던 우리. 메가커피와 이디아의 단골이었다. 아이스티에 샷을 추가한 달콤 씁쓸한 음료.

뻥 뚫린 빨대에 아메리카노가 솟구치듯 공항으로 가는 길은 순탄했다. 항상 공항 가는 길은 막히거나 혼잡했는데... 당시 김현철의 시티팝에 빠진 우린 노랠 크게 틀고 도로를 달렸다. 바다 위를 달리는 다리 위에는 우리 밖에 없었다.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를 타듯 새파란 하늘과 바다 가운데서 독립된 공간을 즐겼다.

공항은 조용했다. 심지어 한국인은 우리 밖에 없는 듯했다. 낯선 타지로 갈 그녀는 이미 적응 중이었다. 여유 있게 도착한 우린 유심, 발권 등 모든 절차를 마무리했다. 절차의 마지막 단계는 또 다른 절차의 시작. 그녀는 떠났다. 마지막 포옹은 어깨동무였다. 그녀가 떠나기 전 날, 방금 태어난 것처럼 엉엉 울고 꽉 안아주는 상상을 했었다. 현실에서는 감회가 달랐다. 그녀 어깨에 눈물을 묻힌 채 꽉 안아주면 영영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안는 것에도 탄성이 있지 않을까. 꽉 안을수록 그 이후에 허전함도 꽉 찬다. 그래서 그랬다. 평상시처럼 보내야 마음에 큰 동요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퇴근. 집으로 가는 길은 무척 고요했다. 심지어 차도 막혔다. 퇴근시간에 흔히 보는 정체였다. 나 또한 다른 의미의 퇴근을 한 걸까. 가는 길에 동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너는 선약이 있어 역시 어렵겠지'란 의중이 담겨 있는 목소리로 오늘 술 한잔 하자고 한다. 갑작스러운 번개모임엔 평상시 같으면 못 나간다 했지만 오늘부턴 다르다. 이제 삶에 즉흥성이 더해졌다.

동네 친구들과 갈 곳 없이 떠돌다가 갔었던 동네 술집에 가니 다 모여있었다. 그 술집은 메뉴가 족히 30개는 넘을 것이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동네 친구들과 술 마실 땐 안주는 중요치 않다. 그래서 한 곳에 오래 있을 수 있는 그곳은 일종의 아지트가 되었다. 문을 열자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었고. 만나기로 한 친구들은 다른 테이블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네 술집은 만나려던 사람뿐만 아니라 익숙하지만 낯선 어른들도 보게 된다. 호탕한 웃음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멀리서 친구가 그러더라. “왜 웃고 있냐?”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친구 놈들은 여자친구를 LA로 떠나보낸 착잡한 심경을 유머로 해석한다. 뭐 이젠 친구들도 즉흥의 자유를 얻게 된 거니까. 시간의 제약이 한결 가벼워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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